주말의 새로운 루틴이 생기고 있다. 정확히는 '일요일'의 루틴이다. 루틴이라니. 써 놓고도 정말 일요일에는 어울리지 않는 단어다. '아무 것도 하지 않는 게 계획'인 것이 나의 일요일에 가장 잘 어울리는 표현이었는데 말이다.
이 루틴은 가장 맛있는 커피를 충분히 여유롭게 즐길 수 있을 때 맛보겠다는 나의 바람과 주말에도 꼭 농구 코트 위를 뛰어다니겠다는 나의 욕망이 만나 탄생했다.
사실 마음만 먹으면 커피는 평일에도 마실 수 있다. 재택을 하는 날, 집에서 10분만 열심히 걸어가면 되니까. 하지만 평일의 바쁜 일과 시간 중에 그 시간을 나에게 허락하고 싶지는 않았다. 단숨에 소주 원샷 때리듯 커피를 들이켜고 와야 할 바에야 커피 타임을 포기하는 편이 마음 편했다. 원하지만 포기해야 하고, 가깝지만 갈 수 없어 더 간절해지는 시간은 그렇게 평일에서 주말까지 흘러갔다.
이토록 손꼽아 기다리는 한 잔의 커피는 로프커피 연남의 '콜롬비아 엘 파라이소 리치'다. 이름에서부터 알 수 있듯 풍부한 리치향이 특징인 커피다. 콜롬비아의 엘 파라이소 농장에서 이중 무산소 발효로 독특한 과일의 향미를 만들어낸 원두다. 여기까지가 원두를 설명하는 카드에 적힌 소개글이다.
리치라는 과일도 낯선데, 이중 무산소 발효라니. 낯설고 낯선 단어들의 조합이었다. 그 조합이 주는 매력에 끌려 처음 이 커피를 주문했었다. 그리고 첫 입에 나는 이곳의 단골이 될 것임을, 당분간 이 커피를 주구장창 마셔댈 것임을 직감했다.
제대로 된 잘 익은 리치 맛도 모르면서 아마 이 맛이 리치의 맛이 아닐까 싶었다. 희고 부드러운 과육이 입 안에서 부드럽게 넘어가는 것 같았으니까. 이 커피가 내 입맛만을 사로잡은 것은 아니었나보다. 괜찮은 카페에 가보면 이 원두로 내린 커피를 파는 곳이 심심치 않게 보였다. (이상순의 제주도 카페 롱플레이에도 있다고 한다!)
'콜롬비아 엘 파라이소 리치'뿐만 아니라 디카페인 원두인 '콜롬비아 엘 파라이소 리치 피치'도 인기가 많다. 리치 피치는 역시 그 이름대로 복숭아 향이 좀 더 풍부하게 느껴지는 원두다. 느즈막한 저녁 시간에 마신다면 달콤한 꿈을 꿀 수 있을 것이다.
인기가 많은 원두들이다 보니 이제는 여기저기서 쉽게 찾아볼 수 있지만, 그중에서도 나는 로프커피의 브루잉커피가 가장 맛있었다. 로스팅의 차이일 수도, 바리스타의 브루잉이 달라서일 수도, 따뜻하게 데워진 머그에 담겨 나왔기 때문일 수도, 혹은 그 모두 때문일 수도 있다.
로프커피는 연남동 벚꽃길을 따라 쭉 끝까지 걸어와 오른쪽으로 꺾으면 나오는 오래된 골목길 끝에 있다. 까만 벽 사이로 쨍한 노란색이 눈길을 사로잡는 곳이다. 로프커피 옆으로는 철길이 있어 기차가 지나다닌다. 이 철로는 연남동과 연희동을 가르는 구간이기도 하다. 로프커피가 딱 그 위치에 있어 일요일의 루틴이 만들어졌다. 주말에 농구를 하러 가려면 연희 104고지 정류장에서 버스를 타야 하는데, 정류장으로 향하는 딱 그 길에 로프커피가 있기 때문이다.
일요일이면 늦잠을 자고 일어나 점심을 챙겨 먹고 좀 더 뒹굴거리다가 느즈막히 옷을 갈아입고 나갈 준비를 한다. 한 손에는 농구공을 들고 한 쪽에는 책과 잡지를 넣은 가방을 어깨에 둘러매고 로프커피로 향한다. 이제는 단풍이 지는 벚꽃길을 따라 쭉 걷다보면 나도 모르게 자꾸만 하늘을 올려다 보게 된다. 늦잠을 자고 난 뒤의 개운함과 곧 농구를 하러 간다는 들뜬 기분이 발걸음을 가볍게 만들다.
로프커피에서 내가 가장 좋아하는 자리는 안쪽의 구석자리다. 모서리에 농구공을 집어넣어 등받침 삼아 기대면 널브러져 있기 딱이다. 농구공에 기댄 채 들이쉬는 숨에 커피를 한 모금 넘긴다. 내쉬는 숨에 여지없이 감탄 섞인 짧은 탄식이 섞여 흘러나오며 긴장도 함께 풀려버린다. 비로소 일요일임을. 별일 없는, 그래서 평화로운 일요일의 느긋한 오후를 누리고 있음에 감사함을 느낀다.
숨가쁘게 코트 위를 달리기 전 미리 즐기는 쿨타임. 늦잠과 점심과 커피와 농구로 이어지는 일요일의 루틴은 또 다시 숨가쁘게 달려야 할 평일을 앞두고 미리 즐기는 쿨타임이 되어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