감기인가? 으슬으슬 춥고 목이 따가웠다. 설 연휴 막바지에 감기 기운이라니. 불길했다. 혹시 코로나일까 싶어 편의점에서 진단키트를 샀다. 정확한 결과가 나오기까지 기다리는 15분의 시간 동안 명절에 만난 가족들과 친척들, 고향 친구들의 얼굴이 머릿속을 스쳐갔다. 당장 곧 출근인데 아프면 일은 또 어찌한담. 불안과 걱정이 점점 불어날 때쯤 진단 키트를 확인했다. 한 줄이었다. 결과는 음성. 이번에도 비껴갔다. 이제는 걸릴 때도 된 것 같은데 매번 신기하게도 음성이다. 겨울이면 감기를 달고 사는 나인데. '골골백년'이라는 말이 전혀 근거 없는 말은 아닌가 보다.

겨울은 영 힘들다. 얼마 전 동면에 드는 사람들에 대한 소설을 읽었는데 꽤나 흥미로웠다. 소설에 등장하는 인물들은 건강검진과 상담을 받고 동면을 시작한다. 동면 기간 중에는 동면 가이드가 상태를 체크하고 관리해준다. 자신이 설정한 기간이 지나면 동면에서 깨어나 회복 후 일상으로 복귀한다. 마치 긴 휴가를 다녀오는 것처럼. 소설처럼 겨우내 한 두 달의 시간 동안 잠에 들었다 깨어나면 개운할 것 같았다.

요즘은 주말 내내 거의 동면 상태였다. 금요일 밤에 술을 진탕 마시고 뻗어 이틀을 내리 누워지냈다. 집 밖으로 나가는 동선을 최소화하고 이불 밖을 벗어나는 동선도 최소화했다. 생각할 거리도 최소화했다. 유튜브와 인스타를 오가며 반쯤은 멍한 상태로 보냈다. 수면과 반수면 상태의 반복. 그런데도 개운하지가 않았다. 분명 잠도 많이 자고, 무리하게 움직이지도 않고, 아무 생각도 하지 않으려 했는데 말이다. 회복을 바랐는데 무기력해져 버렸다.

언제부터인가 나에게 겨울은 무채색의 계절이 되었다. 하얗게 눈으로 뒤덮인 세상의 고요함이 좋았었는데, 그래서 더 시리도록 푸르게 느껴지던 하늘과 바다를 좋아했었는데. 요즘은 길고 긴 겨울의 밤의 어둠과 무겁게 내려앉은 차가운 공기가 견디기 힘들어졌다. 길어진 그림자만큼이나 몸도 마음도 늘어져 버린 걸까. 세상을 덮은 눈이 무겁게만 느껴진다.

어제와 오늘이 구분되지 않는 나날을 보내던 어느 날, 친구가 묵직한 유리병을 건넸다. 모과청이었다. 얇게 채 썬 모과들이 유리병 안쪽에 켜켜이 쌓여 있었다. 어머니가 직접 담그신 것이라 했다. 모과를 깨끗이 씻어 도마에 올려두고 손 끝으로 둥글게 잡고 조금씩 짚어가며 채 썰으셨을 모습이 떠올랐다. 서걱서걱 모과를 써는 소리와 그때마다 집 안에 퍼졌을 향긋한 모과향도.

지난 가을, 요가원을 다녀오던 길에 커다란 모과나무를 본 적이 있다. 처음엔 그 나무가 모과나무인 줄 몰랐다. 그렇게나 높고 커다란 모과나무는 처음이었다. 푸른빛이 도는 밤하늘을 배경으로 망고보다도 크고 노란 열매가 나뭇가지에 주렁주렁 열려 있었다. 서울의 주택가 골목에서 우연히 볼 수 있을 거라 생각지 못한 풍경이어서 자못 비현실적으로 느껴졌다. 길을 걷다 갑자기 동화책 속으로 들어온 기분이었다. 이후 한동안 요가원에 다녀올 때면 그 모과나무 아래서 한참을 킁킁거리다 돌아왔다.

모과청을 선물 받은 날, 가방 속에서 혹여나 모과청이 샐까 조심하며 집에 왔다. 무사히 집에 도착해 냉장고 맨 위 칸에 올려두니 왠지 모르게 든든했다. 퇴근 하고 집에 돌아오면 샤워를 하고 나와 가스레인지에 찻물을 올려두었다. 찬장에서는 커다랗고 예쁜 그림의 머그를 찾아 꺼냈다. 어떤 날은 하얗고 둥근 티팟이, 어떤 날은 두 손으로 감싸면 손안에 폭 쌓이는 컵이 꺼내지기도 했다.

찻물이 끓기를 기다리며 냉장고에서 유리병을 꺼내 뚜껑을 힘껏 돌려 열었다. 아마도 이 유리병은 모과청이 담기기 전에는 그 안에 딸기잼이 들어 있었겠지. 그런 상상을 하니 어린 시절의 한 풍경이 떠올랐다. 엄마가 부엌에서 커다란 냄비에 딸기잼을 졸이던 모습. 오래된 기억이 뚜껑을 열자 함께 꺼내졌다.

숟가락 한가득 모과청을 듬뿍 떠 머그에 담았다. 뜨거운 물을 부으면 김이 올라오며 달큰한 모과 향이 퍼졌다. 잠시 동안 두 손으로 머그를 감싸고 모과 향을 맡으며 온기를 느꼈다. 노곤해지고 긴장이 풀렸다. 한 모금씩 홀짝일 때마다 온기가 몸속 깊숙이 퍼져 나갔다. 한 병을 다 비울 때쯤엔 감기기운도 떨어졌다. 

온기가 필요했었나 보다. 긴 겨울 동안 나도 모르게 얼어있었나. 툭 건네받은 모과차에 봄날을 기다릴 기운을 얻었다. 무채색의 계절에 온기를 더해준 노란색이었다. 차를 마실 때마다 브로콜리너마저의 노래 가사가 떠올랐다. 이 차를 다 마시고 봄날으로 가자. 봄날으로 가자. 덕분에 곧 봄이 올 것만 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