해방이다. 오늘은 코로나 자가격리가 끝난 후 첫날이다. 빌라 현관의 문 열림 버튼을 누르는 게 얼마 만인지. 출소를 한다면 이런 기분일까? 휴일이라 그런지, 며칠 동안 비가 내리다 오랜만에 맑은 날씨여서 그런지, 늦은 오후인데도 거리엔 나들이를 나온 사람들로 북적였다. 들뜬 사람들의 표정만큼이나 내 기분도 설렜다. 외출이라니! 매일 침대에 누워 창밖의 하늘을 바라봤건만, 밖에 나와 올려다 본 하늘은 왠지 더 푸르렀다.

며칠 있으면 자가격리 의무도 없어진다는데, 코로나 막차를 이렇게 탔다. 주변에서 코로나에 걸릴 때에도 요리조리 잘 피해갔기에 끝까지 살아남을 줄 알았건만 한순간에 맥없이 걸려버렸다. 경기 종료 휘슬이 울리기 직전에 골을 먹어버린 기분이었다. 허무했다.   

한창 체력을 키워가던 시기였다. 한 달 뒤가 대회였다. 농구를 시작한 이후 처음 나가는 대회다. 3분 체력을 자랑하는 나는 '그래도 7분은 뛰자'는 생각으로 매일 운동을 거르지 않았다. 아무래도 저녁은 불확실한 야근 탓에 고정적인 시간을 확보하는 것이 어려우니 상대적으로 여유 있는 아침을 노렸다. '아침형 인간'이 베스트셀러에 올랐을 때도 '저녁형 인간'이라며 대세를 거스르던 나인데, 농구가 뭐라고 6월까지는 아침형 인간이 되어보자 다짐했다. 여느 때처럼 '10분 더'를 외치다가도 알람이 한 번 더 울리기 전에 제 발로 이불을 걷어내고 일어났다. 나답지 않은 의지였다.  

집 근처 공원에서 줄넘기를 하거나 좀 더 여유가 있을 때는 홍제천을 따라 뛰었다. 조금씩 뛰는 숫자와 거리를 늘려나갔다. 허벅지는 점점 단단해져 갔고, 코트에서 뛸 때면 전보다 숨이 덜 찼다. 체력이 붙는 게 느껴졌다. 다음 목표는 슈팅이었다. 퇴근 후 저녁 늦게라도 연습을 할만한 장소를 물색했다. 팀 연습이 없는 날에는 혼자 슈팅연습을 할 참이었다. 다행히 집에서 멀지 않은 곳에 24시간 개방하는 실내 체육관이 있었다. 비용도 부담 없는 수준이었다. 연습장소로 그야말로 딱이었다. '다음 번에 꼭 가봐야지' 마음먹었다. 모든 게 단계적으로 착착 순조로웠다.

그런데, 코로나에 걸려버리고 말았다.

고열에 오한에 몸살까지. 보일러를 29도까지 올려둔 것도 모자라 극세사 이불까지 덮고 잤는데도 한기에 몸을 웅크리고 잤다. 그러면서도 열감까지 복합적으로 느껴져 혼자 수건에 물을 적셔 이마에 올려두고 열을 내렸다. 어릴 적엔 엄마가 밤새 이렇게 몸을 닦아줬었는데. 혼자 그러고 있으니 서러웠다. 약을 먹으니 그래도 좀 나아져서 며칠 뒤에는 침대에 누워서 업무를 봤다. 그렇게 잘 때도 일할 때도 침대에서 와식생활을 했다. 단단했던 허벅지가 물렁해져 갔다. 마우스를 움직이는 손목에 힘이 잘 들어가지 않았다. 망했다. 3분이고 뭐고 이제 1분이나 뛸 수 있으려나. 

물에 젖은 솜뭉치마냥 축 늘어진 몸을 이끌고 옆 동네 카페에 갔다. 한적한 동네에서 바깥 자리에 앉아 햇빛으로 샤워하며 시원한 커피를 마시고 싶었다. 겨우내 매주 일요일마다 농구 연습을 했던 중학교 앞에 있는 작은 동네 카페다. 일부러 연습시간보다 한 시간 일찍 도착해 카페에서 커피를 마시며 주말을 만끽했었다. 연습 장소가 바뀌어 더 이상 그 중학교에 가지 않게 됐지만 여전히 커피를 마시러 그 카페에 간다. 날이 따뜻해지면 마셔봐야지 다짐했던 마자그랑을 마시러. 겨울엔 내내 따뜻한 핸드드립 커피를 마셨는데, 날이 따뜻해지고 나서는 오로지 마자그랑뿐이다. 다른 메뉴도 주문해볼까 메뉴판을 살피다가도 결국엔 "마자그랑 한 잔이요"를 외치게 된다. 

내가 들르는 날은 늘 날이 좋았고, 바깥 자리는 꼭 한자리씩 비어 있었다. 햇빛은 희고 바람은 순한 그런 날씨. 강아지와 산책을 나온 사람들이 카페 앞을 지나고, 학교 운동장에서는 아이들이 뛰노는 소리가 들린다. 누가 골이라도 넣어 환호성이 들려올 때면 나도 같이 웃음이 났다. 그 기분이 학교 담장을 넘어서까지 생생히 느껴져서.

레몬이 한 조각 띄워진 마자그랑은 이 계절의 싱그러움을 더해준다. 레몬이 가라앉을까 조심하며 커피를 한 모금 하면 부드러운 거품이 입술에 묻어난다. 그리곤 쌉싸름한 커피 향이 올라오다 이내 새그런 레몬 향이 달큰하게 입안을 채운다. 커피를 반쯤 마셨을 때 작은 티스푼으로 조심스럽게 유리잔에 가라앉은 레몬청을 휘저어주면 아까보다 레몬향이 더 진하게 올라오며 코 끝을 살짝 찡하게 만들어준다. 이 계절에 이만한 커피가 또 있을까. 유리창에 등을 기대고 앉아 마자그랑을 한 모금씩 하며 그림자가 길어지는 걸 바라보다 보면 그렇게 일요일 오후가 지나간다.

혼자만의 일상 회복을 앞두고 다시 찾은 카페에서 언제나처럼 마자그랑을 주문했다. 늘 그랬듯 오늘도 역시 날이 좋았고 바깥 자리도 비워져 있었다. 겨우 일주일 만인데 한 달은 지난 것같이 느껴졌다. 나뭇잎들도 그새 색이 더 짙어진 것 같았다. 되찾은 여유에 감사하면서도 커피 잔을 들어 올리는 데에도 힘이 드는 비쩍 마른 팔목을 보니 괜히 더 힘이 빠졌다. 다시 전처럼 뛸 수 있을까. 체력을 회복하는 데만도 시간이 걸릴 것 같다. 그래도 뭐 어쩌겠나. 기운차려야지. 아직 시간이 있으니 조금씩 다시 끌어올리면 된다. 물에 젖은 솜뭉치 같은 몸은 햇볕에 말려버리고, 부정적인 생각은 커피 한 잔에 털어버려야지. 돌아가자, 일상으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