술과의 권태기, 이른바 술태기가 왔다. 첫 문장부터 머리 위로 물음표를 띄울 내 주변인들의 모습이 눈에 선하지만, 우선 다들 침착하시길. 나도 그렇게 생각한 이유가 있단 말이다.
시작은 몇 주 전이었다. 이상하게 술자리가 영 신나지 않았다. 먼저 술 마시자는 말도 잘 나오지 않고, 누군가 술 마시자는 말을 꺼내도 선뜻 대답하지 못했다. 물론 그렇다고 술을 마시지 않은 것은 아니지만 사소한 듯 보이는 이런 변화는 무척이나 당황스러웠다.
아무리 계획적이지 못한 나라도 술 약속을 잡을 때만큼은 다르다. 부쩍 회복이 더뎌지는 신체 나이와 다음날의 업무를 위해 술 약속에도 적당한 포트폴리오가 필요하다. 충동 가득한 성격 탓에 일하다 말고 ‘오늘 ㄱ?’를 외치는 술자리가 종종 있긴 해도 보편적으로 내 술 약속은 잘 짜여있는 편이다. 때론 술 약속을 잡는 일을 즐기기도 해서 (사실은 다가올 술자리를 즐기는 것일 테지만) 누구 하나라도 ‘담에 술 한잔하자’라는 말을 꺼내기라도 하면 놓칠세라 냅다 술 약속을 잡곤 했다. 그만큼 술자리에, 그리고 술에 진심이었다.
그러니 당황스러울 수밖에. 술꾼이라면 응당 그럴듯한 음식을 떠올리기만 해도 술 생각이 나는 법인데, 술맛과 함께 입맛도 길을 잃은 건지 끌리지가 않았다. 무기력하기만 한 술태기에 새로운 자극이 필요했다.
그러던 중 얼마 전, 친한 직장 동료의 결혼식이 있었다. 장소는 내가 좋아하는 종로. 토요일 점심의 종로는 술태기에 불어넣을 새로운 자극으로 충분했다. 9월의 신부가 된 귀여운 친구의 결혼을 축하해 주고 뜨거운 낮 시간의 종로로 나섰다. 격전지마냥 비장하게 향한 곳은 서순라길이었다. 주말 낮술은 사람을 묘하게 설레게 한다. 더군다나 다음날은 숙취에 시달려 하루를 보내도 아쉽지 않을 일요일이었다. 벌써부터 술태기고 나발이고 극복한 기분이었지만 섣불리 들뜨지 않기로 했다.
가파른 계단을 올라가 활짝 열린 창문 너머로 종묘 서쪽의 돌담길이 보이는 맥줏집에 앉았다. 2시 50분. 낮술이 아닐 수 없는 하루 중 가장 뜨거운 시간이었다. 옹기종기 테이블에 모여 앉은 넷은 각자 취향대로 형형색색의 맥주를 골랐다. 이때의 나는 알지 못했다. 이 한 잔의 맥주가 그저 애피타이저에 불과했다는 것을.
뒤늦게 합류한 한 명까지 총 다섯 명은 여전히 밝은 서순라길을 걸으며 다음 술집을 물색했다. 나만 몰랐던 유명하다는 술집에는 이미 대기 인원까지 있을 정도로 사람들이 붐볐다. 돌담길을 벗어나기로 했다. 다음 목표는 막걸릿집이었다. 심지어 아직 오픈도 하지 않아 약간 기다리기까지 했다. 토요일 낮에 막걸릿집 오픈런이라. 괜스레 상기되는 기분이었다.
유쾌한 분위기의 막걸릿집은 막걸리집부터 소주, 맥주까지 다양한 주종으로 가득했다. 열띤 토론 끝에 적당한 막걸리를 골라 와인을 마시는 소믈리에라도 된 마냥 잔뜩 음미했다. 직원들이 일정 시간마다 테이블을 돌아다니며 막걸리 샘플을 따라주는데, 덕분에 낯선 막걸리를 다양하게 마셔볼 수 있었다. 가게 안에 사람들은 점점 많아졌고 그와 비례해 그들의 대화 소리도, 우리의 목소리도 한층 높아졌다. 막걸리도 들어갈 틈이 없이 배가 불러왔지만 멈출 수 없었다. 술태기의 끝이 보이는 듯했다.
기분 좋게 소주까지 마시고 나왔다. 6시 10분. 2차까지 마무리했는데도 아직 저녁 시간이라니, 그래 낮술은 이런 거였지. 그 동네는 유난히 퓨전 음식과 막걸리를 파는 가게가 많았다. 기분 좋게 취한 우리는 2차에서 몇 걸음 떨어진 세 번째 술집으로 향했다. 역시나 첫 손님이었다. 작은 테이블 몇 개만 있는 크지 않은 술집이었다. 당당하게 가게에 들어선 5명을 보시고선 사장님은 난감한 표정을 지었지만 이내 구석 자리를 내어주셨다.
주종은 중요하지 않았다. 메뉴판을 한참 들여다보고는 마시고 싶었던 술을 시키고 손을 한데 모아 짠. 같은 잔에 담긴 오색 찬란한 술이 찰랑였다. 내가 기억하는 술은 여기까지다. 셀 수 없는 병을 마시고 술 코스에서 빠질 수 없는 사진도 찍었다가 와인까지 마시러 갔지만 어째 희미하다. 2차에서였나 미래를 예견한 누군가가 오늘 목표는 지하철을 타고 가는 거라고 했는데, 과정은 기억나지 않아도 어쨌든 지하철을 타고 집에 도착했으니 목표는 달성한 셈이다.
토요일 술자리의 강렬한 기억은 일요일의 지독한 숙취로 돌아왔다. 맥주에, 소주에, 막걸리까지, 도수도 이름도 다채로운 온갖 술들로 가득 채워진 몸은 한껏 날 탓하는 듯했지만 후회는 없었다. 다를 것 없는 일상에 낮술이라는 낭만이, 지루할 틈 없는 술의 변주가 술태기의 막을 내려줬기 때문이다. 그 대가가 숙취라면 기꺼이 온몸으로 받아들일 만했다.
날이 부쩍 선선해졌다. 조금만 쌀쌀해져도 왜인지 느리게 작동하는 빌라 1층의 자동문도, 포근한 이불만 찾아다니는 우리집 고양이도 가을이 왔음을 알려준다. 가을이 오기 전에 술태기가 끝나서 참 다행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