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래동 인근에서 약속이 있었다. 때마침 머리 깎을 때가 되어 근처 바버샵을 찾았다. 문래동도 이제 사람들이 꽤 찾는 곳이라 많은 선택지를 기대했는데 두 곳 정도 검색에 걸렸다. 어렵지 않게 둘 중 공간이 조금 더 한적해 보이는 ‘버터 바버샵’이라는 곳을 선택했다. 큰 공을 들이지 않고 적절한 선택을 한 것 같아 기분이 좋았는데, 또 다른 의사결정 퀘스트가 날아왔다. 이 곳에는 세 명의 바버가 일하고 있었고 한 명을 선택해야 예약 미션이 끝나는 쉽지 않은 상황이었다. (알고 보니 바버 선택 없이 매장예약도 가능하더라.) 하지만 미션은 생각보다 쉽게 끝이 났다. 바버 세 명 모두 각자 프로필 사진을 예약 페이지에 걸어두었는데, 마지막 바버의 사진을 보고 그만 손가락이 머리보다 빠르게 움직였다. 스튜디오에서 촬영한 듯한 다른 사진들과는 달리 마지막 사진에는 매장 안 손님용 의자에 바버가 앉아 있었다. 그리고 그 모습이 꽤 편하고 자연스러워 보여 나 혼자 그와의 케미를 맞춘 채 주저 없이 예약 버튼을 눌렀다.
평소에도 자연스러움에 끌리는 편인 것 같다. 머리스타일도 손대지 않은 자연스러운 가르마를 선호한다. 37년째 어느 가르마를 탈지 못 정한 부분도 있다. 바버샵을 다니고는 있지만, 바버샵의 상징인 포마드 짙게 바른 머리는 아무리 도전해봐도 부담스럽다. 한 번은 과감히 집에서 포마드를 바르고 나왔다가 내 얼굴을 도저히 참을 수 없어 지나치던 건물 화장실에서 머리를 감은 적도 있다.
나에게 포마드 외출과 같은 또 다른 부자연스러운 일이 있는데 그것은 낯선 이에게 대화를 거는 일이다. 처음 만나는 사람과 깐부처럼 수다를 떠는 사람들이 있는데 나에게는 쇄빙선이 와도 아이스브레이킹이 끝나지 않는다. 그래서 사실 이 바버샵 여행은 나에게 꽤나 부자연스러운 일이다. 처음 만난 사람에게 나와 내가 하는 일을 소개해야 하고, 디스턴스 기획에 대해 설명하기 위한 대화를 이끌어내야 한다. 대화가 아무리 어색해도 한 겹 이발 가운 안에 갇혀 도망칠 수가 없다.
이 날은 더욱 그랬다. 날씨는 푹푹 찌는데다가, 일정에 쫓기며 급히 다니는 바람에 바버샵에 도착했을 때 이미 기운은 바닥나 있었다. 자연스러움이고 뭐고 오늘은 대화를 포기해야겠다고 생각하며 사진에 나온 그 의자에 앉았다. 그런데 이 바버님이 나를 포기하지 않으셨다. 이발을 시작한지 얼마 되지 않아 그는 나에게 원래 바버샵에 다니시냐는 질문을 던졌다. 그리고 난 최면에 걸린 사람처럼 “아 제가 사실은 바버샵 여행을 다니고 있어요”라고 고백하며 나의 사정을 털어놓았다. 팀이 같이 글 쓰는 프로젝트를 하고 있다고 말하자 그는 화들짝 놀라며 본인도 글을 쓰고 싶어한다고 이야기를 꺼냈다. 이번엔 내가 화들짝 놀랐다. 죽으라는 법은 없는 것 같았다. 게다가 그도 나와 같이 장문의 글을 써본 경험은 많지 않은 사람이었다. 그는 이제 막 노트북을 고르고 있다고 했다. 공통점을 찾은 우리는 글쓰기의 어려움에 대해 토로했다.
자연스러운 걸 좋아하는 만큼 나의 글도 자연스럽길 바라는데 이게 참 쉽지 않다. 최대한 나의 생각과 상황 그대로를 글로 옮기려 하는데 이 이야기가 내가 아닌 누군가에게 의미나 재미가 있을까 위축되기도 하고, 어차피 뚝딱이 인생인데 자연스러운 걸 추구하다 오히려 불필요한 것을 덧대게 된다. 그리고 글은 아무리 고쳐도 끝이 나지 않더라.. 사실 그도 사진에 있는 자연스러운 느낌을 만들기 위해 족히 200번은 찍은 것 같다고 했다.
글쓰기는 어렵다. 더군다나 대부분의 사람들에게는 학교를 졸업한 이후 ‘긴 글’을 쓸 기회가 현저하게 줄어드는 것 같다. 긴 글을 쓰고 읽는 일은 근로자라면 반드시 지녀야 할 생산성이라는 덕목에 반하기 때문일까. 어찌되었든 명료하고 임팩트있게 의미를 전달하는 것이 직무적으로나 문화적으로 중요해지고 있는 것 같다. 어차피 글이 길어질수록 벌거벗는 느낌이라 짧은 것도 나쁘지는 않다. 하지만 언젠가는 나의 생각이나 상상이 늘어진 ‘긴 글’을 써보고 싶다. 그리고 그 내용이 무엇이든 그의 사진처럼 자연스럽고 사람을 멈춰 세울 수 있는 힘이 있다면 좋을 것 같다.
이발 내내 마스크를 쓰고 있어서 사진에서 보았던 그의 얼굴을 직접 보지는 못했다. 무턱대고 얼굴 좀 보자고 할 수는 없었다. 대신 우리의 글을 읽어달라며 디스턴스 인스타그램 채널을 소개하는데는 성공했다. 그가 이 글을 좋아할지는 모르겠지만, 노트북을 산다고 했으니 언젠가는 나도 그의 글을 읽을 수 있으면 좋겠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