약속 없이도 곧잘 만나곤 하는 친구들과의 자리에서 분위기가 무르익을 무렵 빠지지 않는 대화 주제는 역시, 각자의 연애사다. 조금 특이한 부분이라면 언젠가부터 연애 그 자체가 아니라 연애로 가는 과정에 초점을 맞춘다는 것이려나.

일명 '썸'이라는 표현이 널리 쓰이기 시작했을 때, 오랜만에 만난 친구로부터 썸의 유무에 대해 질문을 받았을 땐 적잖이 당황했던 기억이 남아있다. ‘내가 (너한테) 그걸 왜 말해야 돼...?’라는 의문에는 ‘썸은 아무것도 아니다’라는 인식이 깔려있었던 것 같다. 그만큼 연애에 있어서는 꽤나 진지했던 그 시절의 내가 무색하리만치, 최근 몇 년 새에는 '언제까지 연애 안 할래'라는 핀잔을 듣는 싱글 인구에 자발적으로 들어서고 말았다. 그래서일까? 특별한 계기 없이 이 영화를 보게 된 건.

물론 <60일, 지정생존자>라는 드라마에서부터 눈여겨보고 있던 배우 손석구가 주연을 맡은 영화-게다가 멜로!-라서 개봉 당시에 조금 관심이 있었고, 적당히 가벼운 제목이 맘에 들었던 것도 사실이다. 말 그대로 연애 빠진 로맨스란, 남녀 불문 싱글이 대부분인 내 주변에선 이미 흔한 일이기도 하니까. 영화의 영어 제목대로 'Nothing Serious', 별 뜻 없이 던진 농담처럼 무심코 재생 버튼을 눌렀다.

<연애 빠진 로맨스>의 초반부에는 클리셰*로 치부할법한 설정들을 어렵지 않게 찾아볼 수 있다. 데이팅 앱을 통해 가벼운 만남을 갖고 욕망을 해소하는 사람들, 서로의 연애사를 꿰뚫고 술자리에 모여 주인공을 위로하는 듯 놀리는 듯한 삼총사, 우연한 계기로 시도한 섹스 칼럼을 돌파구로 삼게 되는 매거진 에디터, 문예창작과 출신인 그의 꿈은 소설가라는 것까지. 여느 유명한 드라마나 영화를 떠올리게 하는 요소들은 무의식중에 관객들의 몰입을 돕고 익숙한 플롯을 연상하게끔 한다.

*클리셰: 진부한 표현이나 고정관념을 뜻하는 프랑스어로, 영화나 드라마 등에서 진부한 장면이나 판에 박힌 대화, 상투적 줄거리, 전형적인 수법이나 표현을 뜻하는 용어로 많이 사용된다. (출처: 시사상식사전 | pmg 지식엔진연구소, 박문각)

진짜 이야기는 여기서부터 시작된다. 앱에서 연락을 주고받은 ID 막자영(함자영, 여)과 ID 직박구리(박우리, 남)의 첫 만남은 강남역 10번 출구나 홍대입구역 3번 출구도 아닌 서대문 독립공원 앞에서 이뤄진다. 그것도 민족 대명절이라 불리는 설날에. 딱 봐도 족히 50년은 맛집으로 군림했을법한 허름한 평양냉면집에서 소주 한 병을 사이에 두고 낯선 남녀의 탐색전이 벌어진다.

S#.00 평양냉면집 / 낮

우리: 너는 왜 나야? 너는 보니까 like도 꽤 몰렸을 것 같은데.

자영: 그냥. 다들 뭐 삐까뻔쩍 사진들은 올려놨는데. 그럴수록 왜 더 별 볼일 없어 보이는지.

알만하다는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이며 냉면을 흡입하는 우리.

자영: 그냥 니가 제일 성병 안 걸린 애처럼 생겼던데?

우리: 풉…! 콜록콜록…

이런 발칙한 대사라니. 이토록 독보적인 여성 캐릭터와 통통 튀는 대사들은 정가영 감독의 시그니처다. 독립영화계에서 감독의 이름을 알린 <비치온더비치>, <밤치기>에서는 무려 주연배우 역까지 도맡아, 욕망을 숨기지 않는 정가영 만의 캐릭터를 각인시켰다. 혹자들은 ‘여자 홍상수’라는 칭호를 붙이는 경우도 많았다. <연애 빠진 로맨스> 여주인공의 이름으로 재조명된 세 글자 ‘함자영’은 스크린 안팎에서 정가영 감독이 주창하던 구호와도 같았다.

그리하여 감독의 분신이라고도 할 법한 ‘자영’과 ‘우리’ 사이에 일어난 스파크는 쉬이 꺼지지 않고 활활 타오른다. SP 이상의 의미를 부여하지 않으면서도 낮밤을 가리지 않고 이어지는 두 사람의 애정행각은 평범한 연인으로 보기에 손색이 없을 정도다. 시종일관 웃음이 넘치는 따뜻한 장면들이 몽타주로 이어지는 가운데, 현실을 자각한 ‘우리’는 슬며시 마음을 내비치기도 한다.

S#. 00 칵테일바 / 밤

우리: 연애? 우리가 하는 게 연애 아니냐?

자영: 연애보단 연극에 가깝지?

자영을 보는 씁쓸한 우리의 얼굴 위로 타이핑되는 문구.

- 그녀의 연기는 끝나지 않을지도 모른다. -

S#. 00 우리의 방 / 새벽

멍하니 허공을 보고 있는 우리. 무릎 위에 얹어 놓은 노트북. 우리가 자판을 누르자, 화면 위로 타이핑되는 문구.

- 하지만 이게 정말 연극이라면 나는 자꾸, 이걸 그만 끝내고 싶다는 생각을 한다. -

솔직히 고백하자면, 단편적으로 흘러가는 이 장면에서 멈칫했던 건 안타까운 마음을 한 글자씩 꾹꾹 눌러뱉는 ‘우리’에게서 익숙한 형상을 봤기 때문이었다. 그건 겉으로는 내심 쿨한 척하다가 나에게 긴히 속내를 털어놓던 친구이거나 미처 스스로 깨닫기도 전에 마음이 새나갈까 노심초사하며 자주 주저하는 내 모습 같기도 했다.

농익은 밤의 대화에 귀 기울여 보면 누군가는 마음을 내줬다가 울고, 누군가는 마음을 뺏겨 아파하고, 누군가는 체념하고, 누군가는 진심을 외면한 채로 얽히고설킨 마음들이 고개를 내민다. 인정하기 싫지만 연애를 하지 않더라도 연애 빠진 로맨스에 허우적대는 게 비루한 현실인 셈이다.

그래서 이 영화는 해피엔딩이냐고? 결국 로맨스의 종착지는 연애이지 않겠냐고? 누구든 궁금해할법한 질문이면서도 실은 그다지 중요치 않은 답변일 수도 있겠다. 남의 연애, 아니 로맨스에서 가장 흥미로운 부분은 결과가 아닌 과정이지 않던가. 일상의 틈새를 뚫고 불쑥 튀어나오는 플래시백 장면들처럼 말이다.

S#.00 (플래시백) 이자카야 / 밤

자영: (호기심 가득한 눈으로) 야, 넌 사랑이 뭐라고 생각해?

우리: 사랑? 글쎄, 난 잘 모르겠네. (잠시 창밖을 보다가, 자영에게 시선을 돌린다) …내가 원래 소설 썼었거든.

자영: 응. (턱을 괴고 빤히 보는)

우리: 존나 성공하고 싶었었다? 결국에는 포기했지만. 내가 제일 좋아하는 소설가가 이런 말을 했었단 말야. ‘사랑을 해보지 않은 자는 소설을 쓸 수가 없다.’ 크흐… 내가 그 말 들은 다음부터 그냥… 잘 안 써지더라구.

자영: 야, 너 소설 쓰게 해줄까?

자영을 보며 웃는 우리. 두 사람 눈을 맞춘 채로, 자영의 얼굴에도 미소가 번진다.

끝내 마음을 내어주었던 상대방으로부터 기인한 마음의 상처는 온전히 사라지지 않는다. 그리고 훗날, 심장 언저리에 새겨진 흔적들을 그러안은 두 사람이 만났다 한들 이제 막 진짜 이야기가 시작되었을 뿐이다.

<연애 빠진 로맨스> 보도스틸 (제공: CJ ENM)

시간이 교차하는 공간

서대문 독립공원

① 영화 속 장소

서대문 독립공원

② 이 영화가 궁금하다면?

• 제목: 연애 빠진 로맨스 (Nothing Serious)
• 감독: 정가영
• 출연: 전종서, 손석구
• 장르: 멜로/로맨스
• 러닝타임: 95분
• 관람등급: 15세 관람가
• 개봉: 2021.11.24
• 관객수: 60만명
• OTT: 티빙 / 웨이브 / 시리즈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