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술을 주제로 매달 글을 쓸 만큼 술을 좋아하지만, 그래서 혼술을, 특히 집에서 먹는 혼술은 즐기지 않는 편이다. 아니 정확히 말하자면 즐기지 않으려고 하는 편. 애주가에게 혼술만큼 위험한 것이 있을까. 그럼에도 간만에 냉면과 함께 즐긴 혼술에 관해 설명하자면, 그 이야기는 어린 시절부터 시작된다.
경기도에서 태어나 서울에서 거주하던 내가 돌연 연고 없는 대전으로 향한 것은 부모님의 일 때문이었다. 엄마, 아빠는 친구였나 지인이었나, 아무튼 누군가가 대전에서 운영하던 슈퍼마켓을 넘겨받았고, 덕분에 나는 내 의지로 서울에 오기 전까지는 7살 이후 쭉 대전에 살았다. 슈퍼마켓은 터미널 근처였다. 지금에야 새로 공사를 끝내고 여러 상업시설이 들어섰지만, 그때까지만 해도 터미널은 불을 켜도 밝지 않은 것만 같은 형광등 아래, 그물망에 든 구운달걀과 때로는 귤을 파는 작은 미니슈퍼와 군침 도는 델리만쥬를 파는 가게들이 들어선, 아주 오래된 곳이었다.
같은 골목 어귀에 위치한 목이 좋은 자리로 가게를 옮기면서는 동네 주민들도 올만큼 품목이 많아졌는데, 처음 대전에 정착했을 때는 터미널 근처 식당이나 모텔에 쌀이나 주류, 음료를 납품하는 일이 더 많았다. 물론 50미터 남짓한 곳으로 가게를 옮긴 이후에도 배달은 여전했다. 부모님의 슈퍼마켓에 식당 사장님들이 전화로 주문을 하면 아빠는 때로는 오토바이로, 때로는 차로 배달을 나갔다. 여러 이유로 아빠가 가게에 없을 때는 가끔 엄마가 리어카에 물건을 실어 배달을 나갈 정도로 터미널과 가까웠다.
같은 반 친구들의 관심을 한 몸에 받았던, 이른바 ‘슈퍼 집 딸’이었지만 무엇보다 좋았던 것은 터미널을 포함해 그 인근 어느 곳을 가던 다 ‘내 동네’ 같았다는 것과, 근처 식당 사장님들의 귀여움을 한몸에 받았다는 것. 아빠를 따라 식당 배달을 갈 때면 박카스며 믹스커피며, 왠지 엄마는 쉽게 허락해주지 않을 것 같은 것들을 주시기도 했고 떡이며 한과며 온갖 것들을 손에 쥐여주시곤 했다. 이 동네에서의 내 어린 시절을 이야기하자면 뉴스레터 열 편도 족히 채울 수 있지만 오늘 이야기할 곳은 가게에서 100미터 남짓 떨어진 식당, 정확히 말하자면 그 식당에서 팔던 냉면 이야기다.
사실 어릴 때는 냉면을 그렇게 좋아하지도, 싫어하지도 않았는데 특히나 함흥냉면은 고기를 구워 먹고 마무리 의식, 딱 그 정도였달까. 그런데도 엄마는 ‘아무거나 잘 먹는 애'는 아니었던 내가 잘 먹어서인지 여름이면 꼬박 오이와 깨와 삶은 달걀을 올린 냉면을 해주곤 했다. 중, 고등학생이 되어서는 여름이 되면 마치 으레 먹어야 하는 음식처럼 내가 먼저 냉면을 찾았는데, 알고보니 그 냉면이 바로 내게 늘 요구르트를 주시던 식당에서 파는 냉면이었던 것. 터미널 근처에서 가게를 하면서 동네 온 식당 사장님, 이모들과 친했던 엄마는 식당 냉면이 맛있다는 이야기를 듣고 식당에서 구매해 팔던 냉면 육수와 면을 사 오시던 것이었다. 그 이후로는 매년 여름, 우리 집 냉장고에는 부족함 없는 개수의 낱개의 냉면 육수와 면이 있었다.
다시 그 냉면이 생각난 건 8월의 어느 날이었다. 부쩍 몸도, 마음도 생기를 잃어가던 여름, 병원을 찾아가 최소 세 달은 약을 먹어야 한다는 처방을 받고서 약을 먹던 중이었는데, 까다로울지언정 잃어본 적 없는 입맛을 잃을 정도로 속이 메스꺼운 나날이 계속되는 것이 아닌가. 부작용이 있을 수 있다는 의사 선생님의 이야기를 듣기는 했지만, 극적인 변화에 당황스럽기까지 했다.
메스꺼움이 극에 달했던 날, 더운 날이어서인지 엄마가 해주던 냉면이 생각났다. 당장 배달 앱을 켜거나 슬리퍼만 신고 나가도 냉면은 사 먹을 수 있었지만, 그 식당에서 팔던 그 냉면을 먹고싶었다. 대전에 간지도, 너무 번화가가 되어버린 탓에 동네를 돌아다녀 본 지도 너무 오래되어서 그 식당이 그대로 있는지 확신이 없었다. 그렇다고 냅다 엄마에게 전화를 걸어 물어보자니 내가 냉면을 먹고 싶은 이유에 관해 설명하면 괜히 걱정하실까 싶어 할 수가 없었다.
그러던 중 이르게 찾아온 9월 초의 추석, 엄마가 서울에 왔다. 오랜만에 둘이 꽉 찬 1박 2일을 보내면서 이런저런 이야기를 나눴는데, 그러다 조심스레 냉면 이야기를 꺼냈다. 힘들어서 병원에 갔다는 것, 약을 먹으니 속이 좋지 않았다는 것, 그러다 그 식당 냉면이 떠올랐다는 이야기를. 엄마는 ‘힘들어서 병원에 갔다’는 부분에서 잠시 멈칫했지만, 이내 ‘요즘 힘들거나 아프지 않은 사람이 어딨냐, 잘했다'며, 산책할 겸 방문한 절에서는 조용히 내 이름 옆에 건강하라고 적어 등을 달아주었다. 대전으로 돌아간 엄마는 식당에 가 냉면 재료를 매입하는 날에 몇 개를 같이 주문해달라고 했고 받자마자 내게 택배를 보내왔다.
퇴근해 집으로 오자마자 옷도 갈아입지 않고 뜯은 택배를 보니 웃음이 번졌다. 뭘 이리 급하게 보냈냐는 마음에도 없는 물음에 주말에 실컷 먹으라는 엄마의 답변에 더 큰 웃음이 번지고 말았다. 보내준 택배를 정리하자마자 왜인지 그래야 할 것 같아서 나가서 소주 한 병을 사 와 냉면을 준비했다. 정갈하게 테이블에 앉아 기대하며 냉면 한 젓가락 먹고 소주를 한 잔 넘기자마자 엄마에게 전화를 걸었다.
“엄마, 그때 그대로네. 너무 고마워. 행복해.”
“그래? 다행이다. 그래, 사람이 이렇게 소소한 걸로 행복한 거야. 행복하면 됐어.”
엄마랑 전화를 끊고 나니 왠지 찡했지만 ‘행복하면 됐어'라는 엄마의 마지막 말을 떠올리며 ‘그래 그러면 된 거지, 한껏 들뜬 내 목소리에 엄마도 행복했길’ 속으로 생각하고 다시 한번 냉면 한입에 소주 한 잔을 삼켰다. 소주가 쌉싸름할 때면 그릇째 육수를 들이켠다. 입 안으로 한 움큼 들어오는 살얼음이 짜릿하기까지 했다. 간만의 혼술이었다. 급하게 차리느라 어떤 고명도 넣지 못해서 엄마가 해준 그 버전의 냉면은 아니었지만 그 시절의 나로 돌아가기에는 충분했다. 면을 한 입 가득 넣고 나니 어린 시절 네 가족이 옹기종기 살던 슈퍼마켓 한 켠에 있던 내가, 또 다른 한 입은 동생과 심부름 간다고 터미널 근처 작은 골목들을 누비던 내가 떠올랐다.
십여 년의 시간을 지나온 지금의 나는 냉면에 보리차 대신 소주를 곁들일 만큼 컸지만, 여전히 어린 날의 기억은 힘이 강하다. 켜켜이 쌓인 내 어린 날의 시간은 비단 나 혼자만의 것은 아니겠지. 그 속에는 엄마의 마음이 있었고, ‘내 동네'라고 부를 수 있는 그곳의 정이 있었다. 그 덕에 오늘의 내 소주 한 잔이 있는 거겠지.
가끔 집에서 혼자 조용히 술을 마시는 것도 꽤 좋을 것 같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