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 회사 근처엔 정말 먹을 곳이 없다. 많은 직장인들이 점심메뉴 림보에 빠져 허덕이는데, 이 곳은 림보에 빠질 기회조차 주어지지 않는다. 언제부턴가 회사에서 배달음식을 시켜먹는 일이 많아져 메뉴 선택이 늘어나긴 했지만, 회사에서 배달음식을 고르는 일이 선택의 즐거움으로 이어지지는 않는 것 같다. 우리 회사의 위치는 청담역이다. 청담역이라는 말을 듣고 어디인지 바로 감이 오지 않았다면 그 이유는 청담역이 대한민국 최대 역세권을 갖고 있기 때문이라고 말하고 싶다. 보통의 지하철역을 상상하면 사거리 위 출구 8개 정도의 규모인데, 이 곳은 출구가 14개로 수도권 단일역으로는 가장 많다. 양 끝 출구의 사이의 거리는 무려 655m로 역 전체가 두 개 사거리 사이에 걸쳐 있다. 하여 두 사거리 모두 ‘청담역사거리’라는 이름을 쓰지 못하는 슬픈 전설이 있다고 한다.
강남구이자 역세권이 광활한 만큼 상업공간도 다양할 것 같지만, 두 사거리 사이에는 아파트 단지들이 서로를 마주보고 있다. 그리고 아파트들의 긴 담이 양쪽 거리의 절반 이상을 차지하고 있다. 담 뒤로 멋진 바버샵이 하나쯤 숨어있을 것 같지만, 이 곳은 희망이 없다. 이번에 다녀온 바버샵은 이 거리와 전혀 다른 동네라고도 할 수 있는 역세권의 북동쪽 끝에서 한 골목 안에 위치한, ‘브로바버’라는 곳이다.
이 날은 외부인과의 점심약속이 있었다. 사실 그 골목쪽으로는 잘 가지 않는다. 심지어 이 분이 예약해주신 초밥집은 회사가 이 곳으로 이사 온지 1년 반이 되는 시간 동안 한 번도 가본 적 없는 곳이었다. 사무실 쪽 사거리 대각선 방향인데다 영동대로 횡단보도들은 죄다 반토막 나있어 횡단보도를 무려 세 번 건너야 하기 때문이다. 대한민국 직장인의 타이트한 점심 시간에 비하면 쉽게 결단이 나지 않는 거리다.
그래도 회사 앞 골목인데 이 골목에도 바버샵이 있어 소개하면 좋을 것 같다고 생각하며 걷고 있었다. 그런데 정말 얼마 가지 않아 창문에 바버샵이라 써있는 사인을 발견했다. 약속시간에 늦지 않기 위해 들뜬 마음만 간직한 채 약속장소로 갔다. 식사가 끝나고 왔던 길로 돌아가며 이발 시간 예약을 위해 바버샵 안 쪽으로 들어갔다. 그리고 난생 처음 보는 광경을 목격했다. 문 안에는 바버샵과 미용실이 함께 공간을 공유하고 있었다. 미용실이라 함은 어른이 되어 ‘머리 하러’가는 요즘의 미용실이 아닌 어린 시절 ‘머리 깎으러’ 가던 추억 속의 미용실이었다. 다시 나와 간판을 확인했고, 창문에는 브로바버라는 이름이, 간판에는 석희정 미용실이라는 이름이 걸려있었다.
파격적인 공존이었다. 많은 손님들에게 이야기를 들었겠지만 이 놀라운 공존에 대해 묻지 않을 수 없었다. 석희정 미용실은 원래 브로바버 이발사의 어머니가 하던 미용실을 그의 숙모가 이어 받아 하고 있는 곳이고, 본인은 그 한 켠에서 이발소를 운영하고 있는 것이라고 한다. 말 그대로 미용실 의자 2개와 이발소 의자 1개가 홀로 놓여있다. 그래도 나름 이발소가 차지한 공간에는 미술을 전공한 그의 펑키한 그림들과 이발소를 상징하는 짙은 색의 가구들이 놓여있었다. 당당한 소수자의 외침이었다.
내 이발이 시작할 때 옆에 여성분은 끝나 머리를 말리고 계셨다. 물론 다른 미용실이라면 대수롭지 않은 광경이지만, 당시 그 상황은 내겐 남녀 혼탕에 견주는 문화 충격이었다. 하지만 이 공존이 내게 더욱 특별했던 이유는 이 바버샵이 위치한 골목 때문일 수도 있다. 이 골목 뒤는 영동대로라는 대형 도로, 그리고 곧 올라갈 준비를 하고 있는 대형 아파트 단지 공사구역 사이에 위치한 상가 건물들이 이어진 골목이다. 남의 변화에 상관 없이 본인이 있던 자리를 지키고 있는 작은 상가들은 영동대로의 고층 주상복합보다 더 큰 매력이 있다. 그리고 그 거리에는 이제는 잘 떠올려지지 않는 미성년 시절의 기억을 떠올려준 석희정 미용실이, 그리고 그 안에는 브로바버가 있었다.
자꾸 오고 싶은 곳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하지만 좋은 건 역시나 오래가지 않는다. 브로바버를 다녀가고 한 두 달쯤 뒤, 바버에게서 업장을 이전했다는 문자가 왔다. 심지어 도심 반대편인 종로구. 다시 청담 업장을 찾아갔을 때는 브로바버뿐만 아닌 석희정 미용실도 사라지고 없었다. 역시 시간은 모든걸 뺏어 간다. 아쉬움을 넘어 잔인함이 느껴졌다. 얼마 전 나의 유치원과 초등학교 시절을 보낸 우리 가족이 살던 집 근처를 갈 일이 있었는데 그 곳도 동네 전체를 허물고 있는 중이었다. 비슷한 기분이었던 것 같다.
나는 그와 한 번 더 이야기를 나누고 싶어 새로 연 업장을 찾아갔다. 다행히 이 곳도 큰 길이 아닌 조용한 골목에 자리잡고 있었다. 조금 늦을 것 같아 그에게 문자를 보냈는데 천천히 풍경을 보고 오시라는 따뜻한 문자를 받았다. 덕분에 발걸음 속도는 조금 늦추고 여기저기 고개를 돌리며 걸었다. 단독주택을 개조한 카페와 요가학원이 눈에 들어왔다. 도심의 주말이라 조용했지만 햇볕이 워낙 좋아 평일의 생기가 상상됐다. 얼마 지나지 않아 그의 자그마한 업장이 보였다. 이번엔 바버샵만 있는 것 같았다. 그리고 그의 펑키한 취향보다는 골목의 차분한 분위기가 담겨있었다. 그에게 차분한 취향도 있을 수 있지만. 작지만 근사한 독립을 이룬 것을 보니, 공존이 끝난 아쉬움이 조금은 달래졌다.
두 번째로 본 터라 더 많은 이야기를 하게 되었다. 그리고 우리는 한 골목에 대한 추억을 함께하고 있었다. 당연히 이야기는 점심투정으로 시작했다. 그는 청담에 있을 당시 먹을게 너무 없어 점심을 거르거나 간편히 싸왔다고 했다. 그래서 그렇게 도망치듯 멀리간 것일까. 새로 이사온 거리를 이야기 할 때 그의 얼굴이 화색이 돌았다. 이 거리를 따라 걸으면 조용한 카페와 작은 레스토랑부터 퇴근할 때 들려 소주 한 잔 할 수 있는 북적이는 시장도 나온다고 한다.
이 골목은 조용해도 종로구이니 조금만 벗어나면 오래된 골목과 술집들이 즐비할 것이다. 한강 이북은 그래도 꽤 많은 가게들이 ‘노포’라는 타이틀을 얻고 자본의 공격으로부터 민중의 보호를 받고 있다. 하지만 한강 이남인 석희정 미용실 골목 청담 ‘노포’(나름 연식이 있다.)들은 석희정 미용실처럼 곧 사라질 수도 있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이제 반찬투정은 적당히 하고 회사 앞 청담 노포들을 조금 더 자주 찾아야겠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