외국 여행도 가능한 이 시기에 왜 하필 제주냐 묻는다면. 「다운의 술 한잔에 넋-다운」
담배는 끊어도 술은 못 끊는다. 숙취에 지쳐 오늘은 절대 안 된다고 외치다가도 오후 4시만 되면 어떤 안주에 한잔할지 드릉드릉 시동을 걸던, 이른바 술 전성기(a.k.a. 망나니)를 누리다 지금은 자칭 술 안정기를 겪고 있다. 가능한 한 조용하고 술과 페어링하기 좋은 음식이 준비된 술집, 종잡을 수 없이 얕고 넓은 그러나 때때로 깊어지는 대화, 그 자리를 함께하는 사람. <술 한잔에 넋다운>에서는 엉터리 같지만 나름의 경험을 토대로 설정한 술자리 3요소에 대한 다운의 시선을 담는다.
|
|
|
|
공항에서부터 야자수가 보이는 제주. 11월에 얇은 긴소매 티셔츠만 입어도 딱 좋은 바람이 불어온다. 지연된 비행기 탓에 계획과는 다르게 해가 질 무렵 도착했지만, 아무렴 좋다. 아니 애초에 계획이란 없었던 것 같기도. 이 휴가를 위해 준비한 거라곤 왕복 비행기 편과 나흘간 묵을 숙소와 한라산 탐방 예약, 그뿐이었다. 외국으로도 여행이 가능한 이 시기에 왜 하필 제주냐 묻는다면 이 ‘한라산 원정대'에 대한 설명이 필요하다. 설명에 앞서 오늘의 레터에는 이 음악을 곁들이면 과몰입하기 딱 좋을지도.
첫 직장에서 막 1년을 보낸 4년 전 11월, 연말 행사로 바쁘던 과거의 나는 일에서 도망갈 핑곗거리가 절실했다. 쭈뼛거리며 팀장님께 가 휴가 일정을 공유(라기보다는 허락에 가까웠지만)하고 받았던 따가운 눈초리는 아직도 기억에 선명하다. 겨우 하루의 휴가를 받아 내가 향한 곳은 한라산. 운동과는 지금이나 그때나 거리가 멀었던 내가 어쩌다 그런 생각을 했는지 아직도 의문이다. 날이 좋아서였을까, 일에 치여 너덜거리던 내게 무엇으로든 간에 성취가 필요해서였을까. 어쨌든 그렇게 동네 산도 오르지 않다가 인생 처음으로, 그것도 혼자 한라산에 올랐다. 인생 첫 한라산에, 몇 번을 올라도 만나기 어렵다는 맑은 경치의 백록담을 내 눈에 담은 순간 내 성취 게이지는 가득 채워졌고 언젠가 다시 이 산을 오르리라 굳게 다짐했다. 그리고 딱 3년 후인 2021년 11월, 충동의 인간은 잊고 지내던 그때의 다짐을 야금야금 꺼내 다시 한번 한라산 등반을 도모하게 되는데…
가야겠다 생각은 했지만 20대 후반에도 삐걱삐걱 올라가던 한라산을 3년이 지난 시점에도 혼자 오를 자신은 없었다. 사람 모으는 데는 역시 술만 한 게 없지. 술 친구들에게 조용히 접근해 술의 힘을 빌려 첫 한라산 원정대를 모았다. 모이고 보니 내 전 직장 동료와 현 직장 동료가 함께하는 묘한 모임이 되었지만 색다른 조합이라 오히려 좋았다. 이후는 일사천리였다. 정신 차려보니 어느새 아이젠을 차고 등산 스틱을 든 채 한라산 관음사 입구에 서 있었다. 유난히 매서운 바람이 불어오던 2021년 11월의 한라산은 중턱부터 조금씩 눈이 보이기 시작하더니 삼각봉 대피소에 도착했을 즈음에는 완전한 설산의 모습이었다. 인생 두 번째 한라산이 설산이라니. 첫 한라산 원정대의 모험은 정상에 오르지 못했어도 더할 나위 없는 성공이었다.
또 한 해가 흘러 2022년 11월, 다시 제주다. 간만의 오프라인 행사로 어떻게 지나갔는지도 기억나지 않는 10월, 11월이었다. 행사를 좋아한다는 말이 쏙 들어갈 뻔할 정도로 정신없이 행사를 치르고 맞이한 휴가였다. 설산의 벅차오름은 만끽했지만 백록담의 짜릿함은 맛보지 못했던 작년의 아쉬움을 만회하기 위해 한 번 더 한라산 원정대가 출동했다. 이번에는 또 한 명의 술 친구(이자 동료)를 설득해 총 네 명. 합정 어딘가의 술집에서 술기운이 거나하게 돈 순간을 노렸다. 역시 술은 여러모로 최고다. 작년 원정대원 중 현 직장 동료는 퇴사를 해 올해 한라산 원정대는 더 묘한 모임이 되고 말았다. “대체 무슨 조합이야?” 누군가 물어오면 답은 늘 같았다. 우리는 한라산 등반을 위해 모였다.
동료들이 많아 든든했지만 사실 정상까지 오를 자신은 없었다. 나는 여전히 운동과는 어색한 사이였고 평상시에 동네 낮은 산도 오른 적 없던 터였다. 여차하면 올랐던 길을 다시 내려가야겠다 생각했지만, 한라산 돌계단 칸칸이 내뱉은 내 호흡이 아까워서라도 내 선택지는 하나여야 했다. 주어진 길을 오르는 것. 쉼의 지점마다 제일 마지막으로 도착해 헉헉대며 ‘내년에는 진짜 못하겠군.’ 속으로 조용히 되뇌었다. 그렇게 도합 백서른아홉 번 정도의 위기를 맞닥뜨리고 드디어 4년 만에 한 번 더 한라산 정상에 도착했다. 물론 원정대원들 중 가장 꼴찌로. |
|
|
막상 오르고 나니 도착한 순서는 중요하지 않았다. 네 사람이 정상에서 만났다. 원정대원들 모두가 (특히 내가) 중간에 포기하지 않고 정상에서 만났다는 것 자체만으로도 아침 6시 50분부터 누적된 고난의 기억은 휘발되기에 충분했다. 구름이 잔뜩 껴 있던 백록담은 한라산 원정대가 정상에서 만나니 드디어 왔군, 속삭이기라도 하듯 빠르게 개었다. 백록담 주위로 몰려든 산악인들의 함성이 들려온다. 아, 비로소 정상이다. 여섯시간 반만에 그토록 바라던 백록담을 눈에 담고 나니 주책맞게 눈물이 조금 날 것도 같았다.
“와 진짜 우리가 해냈네.” |
|
|
똑같은 감탄의 말을 몇 번이고 내뱉으며 발아래 깔린 구름에 마지막 감탄을 내뱉고 나니 허기가 몰려왔다. 지독하게 현실적이다. 등산보다 더 어렵다는 하산의 길이 남아있는데 큰일이었다. 급한 대로 각자 가방 속에 있는 간식들을 십시일반 모아 급속으로 에너지를 충전했다. 하산 시간이 임박했음을 알리는 방송이 나오고 구름 위 계단을 향해 바삐 하산길에 나섰다. 산을 오를 때보다 몸이 더 삐거덕대는 듯 했지만, 내려가면 올해 최고의 술을 맛볼 수 있다는 일념 하나로 등산 스틱에 의지해 한 발 한 발 내디뎠다.
성판악 관리사무소에 도착하니 해가 뉘엿뉘엿 지고 있었다. 제주의 매서운 바람을 느끼며 숙소에 가는 길에 호스트에게 연락해 숙소 인근 맛집 리스트를 받았다. 만장일치로 제주 흑돼지를 맛볼 수 있다는 식당으로 결정됐고, 온 짐을 챙겨 서둘러 향했다.
식당은 기대했던 것보다 훨씬 규모가 크고 정갈한 분위기였다. 빈 테이블이 없이 가득 찬 고깃집의 전경과 풍겨오는 냄새는 굶주린 우리에게 기대감을 안겨주기에 충분했다. 먼저 도착한 원정대원들을 찾아 자리에 앉으니 보이는 정갈하게 준비된 한 상이 보인다. 더 이상 참을 수 없었다.
“사장님, 여기 소주 한 병 주세요.”
빠르게 소주를 주문하고 잔을 채우기도 전에 기본으로 주는 김치찌개부터 한 입. 맛있다. 약 11시간의 등반을 마친 직후여서일까? 직원분이 잘 구워주신 고기를 한 점 집어 들고 소금에 살짝 찍어 입에 넣는다. 꼬독꼬독한 고기 맛에 흥분을 감추지 못하고 빈 소주잔을 급히 통통하게 채워 우리의 대견함을 기리기 위한 건배 의식을 치렀다. 달다. 아, 내가 이걸 위해 열한 시간을 내리 오르고 또 내렸구나. 술 한 잔에 행복감이 가득 밀려온다. 분명 이 소주는 내가 엊그제도, 그 전날에도 마신 것과 같은 것일 텐데 목표한 바를 몸소 이룬 자들에게 주어지는 행복은 차원이 다른 것임이 분명했다. |
|
|
아니 쌈 채소는 또 왜 이리 신선한 건지! 상추 위에 고기 한 점에 고추냉이를 조금 얹어 입에 넣는다. 어렸을 때 지독하게 보던 애니메이션 <요리왕 비룡>에서 주인공이 만든 음식을 먹은 캐릭터들이 ‘미미(美味)’를 외칠 때 나오는 효과음이 내 주위를 맴도는 것 같았다. 이곳은 독특하게 클라우드, 하이네켄과 함께 타이거 생맥주를 판매했다. 제주 흑돼지를 곁들인 타이거 생맥주의 맛은 어떤가 싶어 맥주를 시킨 원정대원의 허락을 받아 한 모금 마셔본다. 라거 특유의 청량감이 목을 타고 넘어간다. 여기가 싱가포르던가.
이번엔 듬뿍 양념이 묻어있는 김치와 함께 한 입. 젓갈을 많이 넣어 진한 맛이 나는 김치와 먹는 고기는 맛이 없을 수가 없다. 다디단 소주를 한 잔 삼킨다. 종일 야외에 있었던 탓에 약간의 술에도 모두가 쉽게 상기됐다. 그래도 오늘은 다 괜찮다. 뭐든 좋다. 우리는 오늘 한라산을 정복했다.
그야말로 술이 술술 넘어가는 이 상에 고기와 곁들일 냉면이 빠질 수 없었다. 물냉면에 겨자만 약간 넣고 그릇째로 마시니 뜨거웠던 속이 시원해지면서 눈도 같이 떠졌다. 바로 소주 한 잔을 들이켜니 ‘캬’ 소리가 절로 나왔다. 다사다난했던 하루의 기억이 소주 한 잔에 말끔히 내려가고 온전한 행복감만이 남는다. 고개를 들어 원정대원들을 바라보니 빠르게 채워지는 행복감은 나만 느끼는 게 아닌 듯싶었다. 비워진 술잔을 든 원정대원들 모두가 행복한 표정으로 서로를 바라봤다.
먹을거리가 잘 차려진 술상 위로 오가는 대화는 당연히 한라산을 오르내리며 겪은 에피소드들. 아, 등반의 온 과정이 자기 자신과의 싸움이었을 테니 에피소드라기보다는 무용담이라고 해야 할까. 고작 네 명의 원정대원인데 자연스럽게 선발대와 후발대로 나누어진 것, 지난밤 충분히 잠을 자지 못해 오르는 내내 현기증이 날 정도로 하품을 했던 것, 하산하는 사람들에게 정상까지 얼마나 남았는지 물어보며 셀프 희망 고문을 했던 것, 정상에 먼저 도착해있던 선발대가 저 멀리 후발대를 발견하고 반가워하던 것. 이 모두가 하루에 일어난 일이었다. 고기 불판 앞에 앉아있는 우리는 더 이상 열두 시간 전 한라산 관음사 입구에 있던 사람들이 아니었다.
아직 밤은 끝나지 않았다. 부른 배를 두들기며 숙소로 이동해 밤바다의 파도 소리를 배경 삼아 조촐한, 하지만 제주의 정취가 가득한 안주에 술로 목을 축이던 우리만의 2차 세리머니 이야기까지 할 말은 많지만 오늘은 여기까지. 압축한 이야기를 하나하나 늘어놓자면 디스턴스 최초로 시리즈 레터가 될 수도 있다. 레터 속에서 지워진 내용들은 원정대만의 추억으로, 또 (그들은 모르지만) 원정대원들의 송년회 겸 3차, 4차 세리머니 술자리의 안줏거리로 남겨두겠다. 그러다 어느샌가 2023년 한라산 원정대를 꾸리고 있을지도. |
|
|
한라산 원정대의 3박 4일 제주 여행에서는 다음 제주 여행에서도 꼭 가고 싶어 지도에 저장해둔 곳이 많았다. 포털 사이트에 검색하면 뜨는 줄 서는 식당들 말고 제주에 왔음을 실감할 수 있는, 소박하면서 색다른 제주의 술집 두 곳을 소개한다.
① 옵서예 몸국 제주 제주시 동고산로 12
원정대원 중 한 명의 ‘나만 알고 싶은 가게’였던 이곳에서는 제주의 몸국과 고사리육개장, 돔베고기를 맛볼 수 있다. 눅진하고 든든했던 몸국과 갈치속젓과 함께 먹는 야들야들한 돔베고기가 일품이다. 매일 사장님 마음에 따라 달라지는 밑반찬과 직접 길러서 내어주시는 싱싱한 쌈 채소도 빼놓을 수 없다. 부족한 반찬을 더 달라고 말씀드리면 이전보다 더 넉넉하게 담아주시는 사장님 인심 덕에 배부르지 않고는 못 배기는 곳이다. 혼자 가기보다는 두어 명이 같이 가서 꼭 몸국에 돔베고기까지 먹어보길.
처음으로 전통 제주 막걸리를 마셔보았는데 인위적인 느낌 없이 막걸리 특유의 맛에 충실해 반주로 한잔하기에 딱 좋았다. 물론 나는 소주가 더 좋았지만. |
|
|
② 일도가공 제주 제주시 관덕로15길 9 1층
제주에 도착한 날 묵었던 숙소 근처의 술집을 찾다가 발견한 가게. 제주 특산 식재료로 강렬한 안주를 선보인다는 가게 소개에 이끌려 방문했는데, 알고 보니 제철 재료 수급에 따라 안주 구성이 바뀌어 온라인으로는 메뉴 제공을 아예 하지 않고 있었다. 가지 쥬키니 튀김과 제주 보리 아란치니와 함께 곁들인 성산포 소주는 지금 생각해도 완벽한 조합이었다. 특히 처음 맛보는 성산포 소주는 마치 정종 같으면서도 증류식 소주답게 깔끔하고 부드러워서 리조또볼 같던 아란치니와 무척이나 잘 어울렸다. 나중에 찾아보니 구좌에 위치한 양조장에서 이 성산포 소주를 마시면 성산포까지 걸을 수 있다고 해서 성산포 소주라고 불린다는 썰이 있더라는.
일도가공은 술 마시기 딱 좋은 조도와 붉은색 조명이 잘 비치는 테이블, 그리고 여기저기 놓여있는 담금주나 일도가공만의 소주잔 같은 소품들이 독특한 분위기를 자아낸다. 심장을 뛰게 하는 베이스 음향 그득한 음악들은 일도가공만의 특별한 분위기를 배가시키며 술맛을 돋우기 충분했다. |
|
|
Distance
distance@domo.co.kr서울시 강남구 학동로 518 로고스빌딩 2, 3층 02-6253-4000수신거부 Unsubscribe |
|
|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