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은 좀 뜬금없는 술 이야기를 해볼까 싶다. 정확히 말하면 술 이야기를 빙자한 여름날의 여행 이야기를.
애주가에게 연말연시란 그야말로 긴 해피아워 같다. 스스로 지켜왔던 집에서의 혼술 금지령마저도 ‘아, 거의 반값이니까’라며 한 잔 주문해버리고 마는 해피아워처럼 ‘아, 연말이니까’와 같은 핑계로 허물어지기 쉬우니까.
오늘 일은 내일, 내일 일은 1월의 나에게 미룬 채로 술을 마시며 그렇게 또 한 번의 연말이 지났다. 디스턴스 소재로 다룰 술자리는 차고 넘쳤지만, 청개구리 같게도 오히려 그래서 더 연말 술자리 이야기를 하기 싫었달까. 그런 이유로 연말처럼 내내 취해있던 때가 언제였던가 기억을 더듬어보다 떠오른 게 바로 여름날 여행지였다.
나는 보통 여름에 여행을 가지 않는다. 워낙 더위를 많이 타는 체질인 데다 화도 많아 여름엔 가능한 한 외출도 피하는 편이다. 그런데 여름에 여행을 갔다는 것은 그럴듯한 핑계가 있었기 때문이었다.
퇴사였다. 충무로를 누비며 술 전성기를 누비던 그 시절, 그 첫 회사에서의 퇴사 후 적지도, 많지도 않았던 퇴직금을 들고 프라하로 떠났다. 좋아하던 맥주의 원산지에서 마시는 맥주도, 블타바강을 바라보며 카를교 위에서 피우는 담배 한 개비도, 왜 퇴사 기념 여행지가 프라하인지에 대한 답변으로 충분했다.
눈을 뜨면 책 한 권, 카메라 한 대를 넣어 운치 있는 돌바닥을 터벅터벅 헤쳐 나가 단골인 양 광장에 있는 식당 야외 테라스에 앉는다. 거품 낭낭한 코젤 한 잔을 시켜 광장을 거니는 사람들을 구경하고 근처 테이블에 자리 잡은 사람들 간에 오가는, 전혀 알아듣지 못하는 체코어에 귀를 기울여본다. 손에 들고 온 책 제목은 <서울의 3년 이하 퇴사자의 가게들>, 그 부제는 ‘하고 싶은 일 해서 행복하냐 묻는다면?’. 이제 막 사직서를 제출하고 온 이에게 어울리는 책이었다. 내리쬐는 볕 아래에서 미지근해질 뻔한 맥주를 마시며 책에 한참 빠져든다.
진한 맥주 한 잔에 밥 한 끼 먹은 듯 든든해지고 나면 다시 돌바닥을 박차고 나서 카를교로 향한다. 카를교 한가운데에서 하염없이 전경을 바라보며 담배 한 모금. 달지 않을 수가 없지. 그러고선 정처 없이 걷는다. 인적 하나 없는 고요한 골목부터 시끌벅적한 메인 거리까지 거닐며 필름에 담는다. 한국 길거리에서는 부끄러울지 몰라도 낯선 여행지에서는 과감해지는 법이다. 게다가 따사로운 햇살을 받으며 마신 맥주 한 잔도 톡톡히 제값을 발휘했을 터였다. 한참을 걷다 앉고 싶어질 때쯤이면 또 다른 광장으로 흘러가 점심인지 저녁인지 모를 파스타나 피자에 맥주 한두 잔을 곁들인다.
해가 질 때쯤 저 멀리 성에 노란 불빛이 들어오면 야경의 명소다운 프라하의 광경이 펼쳐진다. 카를교 위의 작은 악단이 연주하는 곡을 배경음악 삼아 두 눈 가득 야경을 담고 나면 카를교를 지나 어느 한적한 식당에 들어가 다 먹지도 못할 작은 꼴레뇨 한 접시에 맥주로 마른 목을 적신다.
프라하의 일상은 그랬다. 고작 한 주 반 정도 머물렀지만 내리 취해있던 기분이었다. 아, 기분이 아니고 사실인 건가. 퇴사의 짜릿함(?)이 사라지기 전이라 아무 생각 없이 온전히 여행지의 그대로를 느낀 시간이었다. 다시 한국으로 돌아와 맞이할 한 여름의 태풍은 짐작하지 못 한 채, 마치 1월의 내게 모든 걸 미뤄놓고 즐기는 연말처럼.
프라하에서 다시 돌아온 한국은 지독한 폭염이었고 나는 12월에 미뤄둔 일을 맞이한 1월에 놓인 사람처럼 피할 수 없는 일들을 마주했다. 새로운 직장, 새로운 일을 만나기까지 꽤 오랜 시간이 걸렸지만, 어쩌면 한 여름 아무 생각 없이 취해있었던 프라하의 짧은 시간들이 그 지지부진한 몇 개의 계절을 버티는 힘이 되었는지 모른다.
다시 1월이다. 숫자도 낯선 2023년. 해를 거듭할수록 새해의 새로움은 사라지는 듯하지만 확실한 다짐은 있다. 올해에도 성실히 사람들과 술을 마실 것. 많이 듣고 많이 나눌 것. 미뤄둔 일을 피할 수 없는 1월이지만 다정한 사람들과 연말에 나눴던 따뜻한 기억들을 야금야금 자양분 삼아 겨울을 나야지.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