교복을 입고서 비디오 가게를 뻔질나게 드나들던 시절에 영화감독의 꿈을 품고 대학에서 영화 연출을 전공했다. 졸업영화를 찍고 방황의 시기를 보내다가 영화 홍보마케터로 수년간 일하며 영화계의 쓴맛 단맛을 고루 섭취하고, 무럭무럭 자라 글 쓰는 마케터가 되었다. <자스민의 중고영화>에서는 스크린에 비춰진 거리 속 장면을 일상의 프레임으로 옮겨본다.
이 이야기는
해피엔딩입니다
Jasmine ㅣ2022.07.21
<최악의 하루> 보도스틸 (제공: CGV 아트하우스)
어떤 영화는 찰나에 스쳐가는 한 프레임 만으로도 숨을 멎게 만든다. 그 찰나의 순간에 숨죽인 관객이 마주하는 건 스크린에 투영된 나의 모습이다. 현실도피처로 선택한 어두운 굴(극장)에 들어가, 기어코 현실로 이어진 구멍 틈새에서 새어 나오는 가느다란 빛을 보게끔 한다. <최악의 하루> 또한 나에게 그런 영화 중 하나이다. 서촌 골목길에서 시작되는 극 중 이야기는 남산의 산책로를 구심점으로 이어진다.
주인공 ‘은희’는 겨우 잠깐 시간을 내어주는 남자친구를 만나러 남산 산책로에 갔다가 그 곳에서 하루 종일 맴돈다. 마치 그의 발길을 끌어들이는 중력이 작용하는 것처럼 남산을 올라갔다 내려갔다 다시 오르기를 반복한다. 그 사이에 은희는 달갑지 않은 과거의 남자와도 마주친다. 결코 뜻하지 않았던 방향으로 상황이 흘러가면서 혼란에 빠진 은희는 힘없는 몸짓으로 벤치에 주저앉고 만다.
길 위에서 설레고 실망하고 분노하고 좌절하던 은희는 결국 체념하기에 이른 것처럼 보인다. 하지만 그를 덮친 감정의 소용돌이는 극 중에서 배우 지망생인 은희에게는 오히려 성장의 계기로 작용하는 듯 하다. 바람에 흘려 보내듯이 연극 대사를 낮게 읊조리는 은희의 목소리에 전에 없던 자기연민이 깊게 묻어나는 것이다. 해가 저물어가는 남산 산책로의 한 장면을 들여다 보자.
S#.00 남산 산책로 / 해 질 녘
남산 꼭대기에 솟은 서울타워의 배경으로 어둑해져 가는 하늘. 은희는 홀로 벤치에 앉아 있다.
텅 빈 눈빛으로 울타리 너머를 내다보던 은희의 입술이 작게 달싹인다.
은희: 긴 긴 하루였어요. 하나님이 제 인생을 망치려고 작정한 날이에요.
안 그러면 어떻게 이런 일이 일어나겠어요? (고개를 살짝 꺾어, 허공을 응시하며)
그쪽이 저한테 뭘 원하시는지는 모르겠지만… 전 원하는 걸 드릴 수도 있지만…
그게 진짜는 아닐 거예요. (잠시 쉬고) 진짜라는 게 뭘까요? 전… 사실 다 솔직했는걸요.
인생의 고단함이 묻어나는 목소리를 따라서 나의 지난날을 떠올려 본다. <최악의 하루>가 개봉했을 당시에 나는 영화 홍보 대행사에서 마케터로 일하고 있었다. 숨 쉴 틈도 없이 쏟아지는 업무 메일과 전화, 문자나 카톡 메시지에 휴대폰 진동이 울리기만 해도 몸을 떨던 때였다. 매일 같이 알람이 뜨는 카톡 목록에는 천오백여 명의 이름이 가득했지만 팔 할이 허울뿐인 관계들이었다. 유명한 배우들과 지근거리에서 일했지만 오히려 그들이 연기한 영화 속 인물들이 더 친밀하게 여겨졌다.
영화를 업으로 삼았더니 정작 영화 한 편 볼 시간도 없이 바쁘더라는 아이러니에는 금세 익숙해져 갔다. 하지만 영화계에서 상처를 받는 날이 수없이 많았고 반대로 영화로 치유받는 날들이 드물게 있었다. 멈추고만 싶은 걸음을 겨우 한 발짝씩 떼어 앞으로 나아가던 시기에 무거운 발걸음을 또 한 번 극장으로 옮긴 건 <최악의 하루>를 만든 감독에 대한 기대 때문이었다. 김종관 감독은 이전에 <폴라로이드 작동법>이라는 단편영화로 이름을 날린 신예 감독이었다. 그래서 실낱같은 기대로 영화의 개봉일을 손꼽아 기다렸던 것이다.
극장에서 만난 <최악의 하루>는 제목과는 어울리지 않을 만큼 사랑스러운 영화였다. (물론 그게 매력인지라 더 오래 기억에 남았을 테지만.) 영화를 보는 내내 몇몇 장면과 대사들은 지친 마음을 어루만져 주었다. 또 어떤 순간에는 ‘영화를 보는 기쁨이 이런 것이었지!’ 하고 새삼 깨달으며 가슴이 벅차올랐다. 이를테면…
S#.00 남산 산책로 / 밤
어두운 밤길을 나란히 걷는 은희와 료헤이. 가로등 불빛에 두 남녀의 실루엣이 어스름하게 빛난다.
가녀린 손을 허공에 뻗는 은희. 나풀대며 춤을 추기 시작한다.
아! 이 영화와 사랑에 빠지게 만들어준 장면이다.
어떤 영화를 사랑하게 된다는 건, 그 안에서 어렴풋이 비친 현실을 바라보는 내 마음의 온도가 일 도쯤 올라가는 일이다. 비록 오늘은 최악의 하루를 보냈을지라도 먼 훗날의 해피엔딩을 가늠해 보는 일이다. 은희가 보낸 ‘최악의 하루’는 우리가 지나온 어떤 날을 되짚어보게 만든다.
뚜렷한 목적지도 없이 그저 발길을 옮기며 생각에 잠겨있거나 아무 생각이 없거나 누군가를 생각하거나 오롯이 나에 대해 생각하던 날. 혹은 길 위에서 반가운 얼굴과 우연히 마주치거나 멀찍이서 피하고픈 사람을 발견하고 급히 발길을 돌리던 날. 기쁨이나 분노를 동력 삼아 힘차게 걷거나 터덜터덜 힘없이 걷다가 털썩 주저앉은 날.
만약 지금 당신이 언젠가 보낸 최악의 하루를 떠올리고 있다면, 반짝이는 이 영화를 장식하는 마지막 대사가 성큼 다가와 말을 건넬 것이다.
료헤이: (일본어로) 하지만 안심하세요.
이 이야기는 해피엔딩입니다.
주인공은 행복해질 거예요.
<최악의 하루> 보도스틸 (제공: CGV 아트하우스)
우거진 나무 그늘 아래
상쾌한 기분으로 걷기 좋은
남산 산책로
① 영화 속 거리
산책 코스 - 남산 케이블카 버스정류장에서 N서울타워까지 2.4km, 도보로 50분
Tip. N서울타워(구 남산타워)로 이어지는 산책로는 완만한 경사로 이뤄져 있어 도심 속의 러닝 코스를 발굴하는 러너들에게도 인기입니다!
② 이 영화가 궁금하다면?
제목: 최악의 하루 (Worst Woman)
감독: 김종관
출연: 한예리, 이와세 료, 권율, 이희준
장르: 멜로/로멘스
러닝타임: 93분
관람등급: 15세 관람가
개봉: 2016.08.25
OTT: 왓챠 | 티빙 | 웨이브 | 시리즈온
💌Letter from Distance
'디스턴스'를 영화로 따지면 어떤 장르로 규정할 수 있을까요? 본격적인 뉴스레터 발행에 앞서 디스턴스를 만들어가는 에디터&디자이너들이 한 자리에 모였습니다!
일명 편집회의(라고 쓰고 워크샵이라고 부르는) 시간은 밤이 새도록 이어졌는데요. 시종일관 유쾌한 농담을 곁들인 농도 깊은 대화가 오가며, 디스턴스에 담아낼 다채로운 색깔을 그려볼 수 있었습니다.
앞으로 디스턴스에서 만나게 될 다양한 장르가 궁금하다면? 화기애애한 웃음으로 가득한 "디스턴스 편집회의" 영상을 확인해 주세요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