담배는 끊어도 술은 못 끊는다. 숙취에 지쳐 오늘은 절대 안 된다고 외치다가도 오후 4시만 되면 어떤 안주에 한잔할지 드릉드릉 시동을 걸던, 이른바 술 전성기(a.k.a. 망나니)를 누리다 지금은 자칭 술 안정기를 겪고 있다. 가능한 한 조용하고 술과 페어링하기 좋은 음식이 준비된 술집, 종잡을 수 없이 얕고 넓은 그러나 때때로 깊어지는 대화, 그 자리를 함께하는 사람. <술 한잔에 넋다운>에서는 엉터리 같지만 나름의 경험을 토대로 설정한 술자리 3요소에 대한 다운의 시선을 담는다.
메뉴판은 거들 뿐
Daun ㅣ2022.07.28
충무로에서 일하던 때 이야기를 먼저 해야겠다. 내 소개글에 적었던 술 전성기는 바로 이때다. 입사 후 첫 전사 회식에서부터 흑역사를 쓰고 그 기억 때문인지 온갖 부서, 특히 영업팀 선배들에게 불려가 술을 배웠더랬다. 덕분에 나는 술 전성기를 맞이했고 을지로와 충무로 일대의 술집들을 빠르게 섭렵할 수 있었다.
오늘 다룰 술집은 그때 자주 다니던 곳 중 하나다. 멀고 먼 부서의 어느 과장님으로부터 알음알음 전해들어 가게 된 곳이었다. 가게 이름과는 사뭇 괴리감이 느껴지는, 고작 네 개 정도의 테이블이 있는 이곳의 이름은 북새통.
희미한 기억을 더듬어보면 아마 첫 방문은 팀 회식이었지 싶다. 팀 막내였던 나는 술을 좋아하는 편인데도 회식날만 돌아오면 머리가 지끈지끈했는데, 을지로와 충무로에 일고여덟 명이 들어갈 만한, 맛도 좋고 적당히 동네 분위기도 묻어나오는 술집을 찾기란 쉬운 일이 아니었기 때문이다. 여기저기 수소문한 끝에 선택한 곳이 이곳이었으나, 등록된 가게 전화번호가 없어서 예약할 수가 없었다. 별수 있나. 막내 된 도리(?)로 6시 땡 퇴근하자마자 달려가는 수밖에. 그렇게 북새통에서의 첫 한잔이 시작됐다.
뿌듯한 표정으로 테이블 두 개를 붙여서 세팅해둔 내 앞으로 선배들이 하나둘 등장했다. 들어옴과 동시에 눈은 빠르게 벽에 커다랗게 붙어있는 메뉴판을 스캔한다. 분주하게 메뉴판을 보며 다 같이 오늘의 안주에 대해 뜨겁게 논의하던 그때 사장님이 외치셨다. “오늘 소라랑 오징어 있어.”
그제야 내 눈에 들어오는 ‘계절 메뉴’. 그니까, 북새통에서 메뉴판은 거들 뿐이다. 스타벅스 오늘의 커피의 시대는 갔다. (물론 계란말이나 어묵탕과 같이 계절을 타지 않는 메뉴는 언제든지 가능하겠으나, 나는 이제까지 한 번도 주문해보지 않았다) 사장님이 오늘 들어왔다는 재료로 내어주신 안주는 두말할 필요도 없었다. 재료로 어떤 요리를 하는지도 사장님 마음. 오징어는 숙회가 될 수도, 볶음이 될 수도 있다. 첫 방문이 인상적이지 않을 수가 있나. 그 오징어는 통으로 숙회가 되어도, 볶음이 되어도 맛있을 텐데.
북새통의 매력은 끝나지 않았다. 여덟 시 반쯤 되니 사장님이 무언의 신호를 주신다. 눈치를 살피던 나는 혹시나 해 몇 시까지 하시냐 여쭈니 아홉 시까지란다. 코로나가 온 세상을 덮치기도 전에 거리두기 버전의 영업시간을 지키시다니?
가장 최근에 북새통을 방문한 건 오후 반차를 쓴 날이었다. 충무로와 을지로 술집을 함께 누볐던 구) 직장 동료이자 현) 술 파트너 친구와 남대문으로 양주 쇼핑하러 갈 계획을 세우다 둘 다 더할 나위 없는 기회임을 직감했다. 퇴사하고 충무로와 멀어졌어도 가끔 추억을 곱씹으며 단골집을 가곤 했는데 북새통은 가고 싶어도 갈 수가 없었다. 9시까지니까.
“사장님, 오늘은 뭐 되나요?”
꽤 능숙하게 오늘 들어온 재료를 여쭤보니, 목소리를 들으니 알겠다며 오랜만이라고 반가워해 주시는 사장님. 이제 일하는 데가 멀어져서 자주 못 온다며 괜한 푸념을 늘어놓고 이내 메뉴(라기보단 재료)를 골랐다. 우리는 낙지를 골랐고 사장님은 볶음을 선택했다. 생물이라 손질 시간이 좀 걸리겠지만 괜찮았다. 북새통은 꼭 세 개 정도의 밑반찬이 그날그날 다르게 나오는데 한 병 정도는 뚝딱이다. 아주 가끔 주시는 소고기뭇국까지 더해지면 그냥 밥만 갖다 먹어도 한 끼가 된다. 아니나 다를까 메인 안주가 나오기 전에 한 병을 끝내니 때맞춰 낙지볶음과 소면이 나왔다. 충무로에 오니 내 발길이 지독하게 닿았을, 이 동네에서의 옛 기억을 또 다른 안주 삼아 한잔은 두 잔이 되고, 이내 한 병이 된다.
넉넉히 남은 양념을 보시던 사장님은 “밥 먹을래?”라는 말씀을 끝내시기도 전에 밥솥으로 향하셨다. 진짜 조금만요, 라는 말이 무색하게 소주잔이 비워지는 속도에 맞춰 순식간에 사라졌다. 든든하고 알딸딸하게 북새통을 나서니 아직 해가 밝았다. 지독하게 싫어하는 여름의 유일한 장점은 낮술을 마실 수 있는 시간이 길다는 것임을 새삼 실감했다. 또 언제 북새통을 갈 수 있을진 모르겠다. 언젠가, 그곳의 시간과 내 시간이 맞닿을 때쯤이리라, 막연하게 생각해본다.
나만을 위한
고요한 술자리를 원한다면
광천상회
북새통에 간 날 남대문으로 양주 쇼핑하러 간 곳은 바로 광천상회. 술 좀 좋아한다 싶은 사람이라면 모를 수가 없는 곳이다. 남대문 시장 수입 명품 상가 입구로 들어가서 계단 밑에서 왼쪽으로 돌아보면 술을 좋아하는 사람들에게는 눈앞에 천국이 펼쳐진다.
요즘은 여기서도 구하기 힘든 것도 있긴 하지만, 각종 양주부터 보드카, 위스키 등 필요한 건 다 있다. 집에서 혼자 고요하게 한잔하고 싶다면 주말에 남대문 시장으로 가 나만을 위한 술을 사보는 건 어떨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