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월. 꽃샘추위가 남았다고는 하지만 바람이 따뜻한 게 느껴질 정도로 성큼 봄이 와버렸다. 오매불망 겨울만 기다리는 자에겐 설 연휴만 지나도 다가올 봄의 설렘보단 지나갈 겨울에 대한 아쉬움이 크기 마련이다. 지극히 주관적인 겨울의 마지노선, 지난 설 연휴를 돌아볼까 한다.
전국민 티켓팅에 자신도, 소질도 없거니와 같이 사는 고양이와의 시간을 위해 명절맞이 본가 방문을 하지 않은 지도 꽤 됐다. 대신 몇 해 전부터 명절 루틴이 생겼다. 아니, 새로운 일거리라고 해야 하나. 새로운 일터는 집에서 가깝지 않은 경기도의 한 시장에 있는 즉석두부 가게.
4~5년쯤 된 과거 직장 동료이자 지금은 술친구의 어머니와 아버지가 운영하시는 이 두부 가게는 시장의 다른 가게와 다를 바 없이 대목인 명절에는 일손이 부족하다. 친구와 친구의 동생, 그니까 자녀들이 총출동해도 손이 부족해 매번 아르바이트를 구하시는데 그게 몇 해 전부터 나인 셈이다. 매일 사무실에 앉아 일을 하다 보니 좀 색다른 곳에서 색다른 일을 경험해보고 싶었달까.
고요한 연휴 아침에 텅 빈 전철을 타고 출근하는 길은 괜히 열심히 사는 기분이 들게 한다. 보통 추석보다는 설이 더 바쁘기 마련인데, 코로나 이후로는 변수가 많아 얼마나 바쁠지 가늠이 되지 않았다. 이번엔 또 어떠려나, 생각하며 한껏 생기 넘치는 시장 안으로 향한다. 두부 가게는 철저한 분업 시스템을 기반으로 운영된다. 아버지와 친구 동생은 제조팀. 명절 기간에는 빠르면 새벽 2~3시부터 출근해서 미리 두부를 만든다. 어머니와 친구, 그리고 나는 판매팀. 두부를 비롯해 떡, 만두, 식혜 등 여러 먹을거리를 판매한다.
작년 추석 이후 반년 만에 뵈는 어머니, 아버지께 활기찬 인사를 드리고 나면 가장 먼저 가격을 확인한다. 몇 번을 해도 도저히 익숙해지지 않기도 하고, 물가 상승으로 인해 가격이 변동되는 경우도 있기 때문이다. 눈보다 빠른 어머니의 손을 도와 추가 포장이 필요한 제품들을 포장하기도 하고, 널따란 매대에 조금이라도 빈 곳이 있으면 제품을 채워넣기도 한다.
시장이란 참 신기한 곳이다. 다른 가게가 북적일 때 고요하기도 하고, 다른 가게가 고요할 때 북적이기도 한다. 한두 명의 사람이 매대 앞에서 제품들을 보고 있다가도 어느새 웅성웅성 ‘줄을 서시오!’를 외쳐야 하는 순간이 올 때도 있다. 때때로 고요할 때는 고개를 돌려 시야에 담기는 시장 가게들을 둘러본다. 채소가게나 전이랑 국수를 파는 가게, 족발 가게, 어묵 가게. 곳곳에 따뜻한 수증기와 맛있는 냄새, 그리고 명절을 준비하는 사람들로 가득하다. 두부 가게에서 일을 하기 전에는 ‘아무리 명절이어도 시장에 사람이 그렇게 많을까’ 궁금했는데, 막상 명절의 최전선(?)에 투입되고 나니 ‘이게 현실이구나’ 싶었다. 제사를 위한 준비뿐 아니라 연휴를 맞이해 가족끼리 도란도란 나눠 먹을 음식을 준비하는 부지런한 사람들이 모이는 곳이 바로 시장이었던 것이다.
어떻게 지나갔는지 모를 오전이 흐르고 나면 교대로 점심을 먹는다. 시장 깊숙이 위치한, 아는 사람들만 알 것 같은 뷔페식 식당에서의 점심시간은 아픈 다리를 쉬게 하는 시간이기도 하지만 든든하게 에너지를 채울 수 있는 시간이기도 하다. 두 종류의 김치와 제육볶음, 나물과 쌈채소, 그리고 콩나물국까지 호불호 갈리지 않는 메뉴들로 차려진 완벽한 한 끼다.
이번 명절에는 아버지, 어머니가 그간 같이 일하면서도 밥 한 끼 같이 하지 못했다며 내 퇴근 시간에 맞춰 문을 닫고 같이 저녁 식사를 하자고 하셨다. 내가 저녁 6시에 퇴근하고 나면, 빨리 마감한다고 해도 8시 정도까지는 보통 가게를 열어두시는데 이번에는 빠르게 가게를 닫고 명절 연휴를 보내기로 하신 것이다. 뒤편에서 계속 두부를 만들던 제조팀은 점심 시간이 지나고 판매량과 남은 두부를 확인하며 제조할 두부의 양을 조절한다. 6시에 닫기 위해서는 남겨지는 두부가 없어야 한다. 5시가 넘어가면 두부가 팔릴 때마다 친구와 남은 두부의 개수를 세며 다가오는 퇴근과 술 한잔을 기다린다.
“이게 마지막 두부에요!”
적극적으로 외치며 마지막 두부까지 판매 완료. 먼저 가서 가게에 자리를 잡으라는 어머니, 아버지 말씀에 따라 먼저 앞치마를 벗었다. 네 덕분에 마지막날 이렇게 일찍 퇴근해본다는 친구의 말에 덩달아 기분이 좋아 가벼운 발걸음으로 길을 나선다. 10분 정도 걸어 감자탕집에 도착해서 테이블 두 개를 잡고 먼저 맥주와 소주를 시켰다. 이 한잔을 위해서 퇴근 전 몇 시간은 물도 마시지 않았다. 마지막 날에는 친구와 나와 이전에 함께 일했던 직장 동료도 함께였다. 마치 전 직장에서 행사를 마치고 뒤풀이하는 기분으로 투명한 노란빛의, 소주와 맥주의 비율이 적절하게 담긴 소맥 한 잔을 건네 들었다. 누군가 감출 수 없는 세 가지가 바로 재채기, 가난, 사랑이라고 했던가. 셋 중에 하나를 꼽자면 이것은 지독한 사랑이리라. 감출 수 없는 미소를 띤 채 소맥을 삼킨다. 외부 행사나 촬영 나가는 일을 꽤 좋아하는 편인데, 이런 뒤풀이 때문이었으려나.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