언제부턴가 회사에서 ‘비니 쓰고 다니는 분’으로 불리게 됐다. 비니만 쓰고 다니는 건 아닌데 조금 서운하지만 그보다 더 서운한 건 ‘분’이라는 칭호다. 챙 없는 모자를 쓰고 다니고 회사에서 제법 나이 있는 축의 사람을 있는 그대로 불러준 것이니 그리 서운할 일도 아니지만 서운하다.
몇 년 전부터 중요한 미팅이나 행사가 있는 날이 아니면 모자를 쓰고 출근하기 시작했다. 그 몇년 전은 30대 중반이 지나며 체력도 주량도 아닌 머리 숱이 빠르게 줄기 시작했을 때다. 이제 머리에 뭐라도 바르지 않으면 종착지가 보이지 않는 M자가 훤히 드러나고, 정수리 부위도 납작해졌다. 자연스러운 일이니 크게 신경 쓰지는 않지만 벌거벗고 외출을 할 수는 없어 모자를 쓰기 시작했다.
머리에 제품을 바르는 걸 끔찍이나 귀찮아 하는데다 모자의 편함에 중독되어 결국 모자를 안 쓰는 날보다 쓰는 날이 더 많아졌다. 덕분에 캐릭터가 굳어 주변 사람들로부터 모자를 선물 받기 시작했다. 내 취향인 것도 아닌 것도 있었지만 입원했을 때 알로에 주스를 받는 마음으로 감사히 받았다.
최근 두어 번 방문한 바버샵의 바버도 모자를 즐겨 쓰는 것 같았다. 방문했던 두 번 모두 똑같은 베이지색의 벙거지 모자(힙한 사람들은 ‘버킷 햇’이라고 한다)를 쓰고 있었다. 바버라고 모두 포마드 머리에 가죽 앞치마를 두르고 손님을 기다리는 건 아니지만, 벙거지 모자에 마스크까지 써 눈코입이 하나도 보이지 않는 바버는 처음이었다. 인상을 모르니 처음 만남에는 감히 말을 붙이지 못했고, 두 번째 만남에 내가 원했던 스타일을 기억해주는 것을 보고 말을 붙여봐도 되겠다고 생각했다.
“앞이 보이세요?” 그의 모자에 대해 대화를 나눠보고 싶었고 어렵게 꺼낸 질문이었다. “모자 때문에 잘 보이시나 해서요.” 당황한 그를 안심시키기 위해 질문의 의도를 조금 더 자세히 설명해주었다.
“아, 앞이 잘 안 보여서 쓰는 거예요.” 그가 대답했고, 무슨 말인지 모르겠던 나는 다음 말을 기다렸다. “머리를 기르고 있는데 머리가 계속 흘러내려서요. 시야를 자꾸 가려서 모자로 누르고 있는 거예요.”
아, 우리는 너무나도 다른 사람이었다. 나는 그와 나와의 공통점을 찾고 싶어 모자라는 매개체로 대화를 만들어보려 했다. 결론은 나는 없는 머리 숱을 가리기 위해 모자를 쓰는 사람이었고, 그는 차고 넘치는 머리 숱을 주체하지 못해 모자를 쓰는 사람이었다.
더 이상의 질문이나 대화는 하지 않았다. 기분이 나빠서는 아니고, 그 순간이 마치 진공 상태처럼 느껴져 어차피 나의 말도 그의 말도 서로 전달되지 않을 것 같았다. 그는 그의 우주에 나는 나의 우주에 살고 있었다. 서로 만날 수도, 굳이 만날 필요도 없었던 것이다.
이발이 끝나고 그는 모자와 마스크를 벗어 나에게 인사해주었다. 역시 풍성하고 굵은 모발의 소유자였다. 이발소를 나와 벗었던 모자를 다시 썼다. 잠시 새로운 차원의 문을 두드렸던 나는 멀리가지 못한 채 다시 ‘비니 쓰고 다니는 분’으로 돌아왔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