새로운 시작이 이어지는 3월, 평화롭던 회사에 새로운 커피머신의 도입을 앞두고 논쟁이 벌어졌다. 카페인이냐 디카페인이냐. 그동안 체험용으로 쓰던 3층 라운지의 커피머신은 곧 작별을 고할 예정이었다. 새 커피머신의 도입으로 앞으로 함께 할 원두가 정해지는 중요한 기로에 놓인 순간, 선택은 투표로 결정키로 했다. 디카페인이냐 카페인이냐를 묻는 게시물이 사내 게시판에 올라왔다. 묘한 긴장감이 감돌았다. 투표 방식은 간단했다.
Yes - 디카페인이 좋다.
No – 커피 먹고 졸린 게 말이 되냐. 카페인을 달라.
농구 코트 전광판처럼 'Yes', 'No' 숫자가 실시간으로 올라갔다. 디카페인이 무난히 승리를 따낼 것이란 초반 예상과 달리 카페인 숫자가 무섭게 치고 올라왔다. 점심 즈음, 숫자가 동률이 되자 디카페인 진영에서는 탄식이 흘러나왔다. 투표 종료는 6시. 판을 뒤집을 시간은 충분했다. 물밑에서는 중도파를 디카페인으로 포섭하기 위한 움직임이 거세졌다. 오후가 되자 결과는 역전됐고, 그대로 투표 종료. 디카페인파는 환호했다.
영지는 부석순의 <파이팅 해야지>에서 이렇게 노래했다. '모닝커피는 디카페인'이라고. 하지만 난 모닝커피를 마시러 2층으로 간다. 2층에는 카페인 원두가 있다. 디카페인은 저녁을 위한 선택이다. 일은 남았는데 머리는 무거워질 때 디카페인은 좋은 선택지가 되어준다. 일종의 플라시보 효과랄까. 코 끝으로 들어오는 커피 향에 머리가 착각을 하고 생체 시계를 다시 아침으로 돌려준다. 카페인이 없으니 몇 잔을 연거푸 들이켜기에도 부담이 없다. 야근이 몰리는 월말 월초가 그 시기다. 3층 커피머신 앞에서 버튼을 누르는 건.
프랜차이즈 카페를 홍보할 때였다. '가장 많이 팔린 메뉴는 아메리카노' 같은 뻔한 연말결산 보도자료는 쓰기 싫어 고민하다가, 전국 매장의 지역별 판매량을 분석해 봤다. 서울에서 커피 메뉴 점유율이 전국 평균보다 높게 나타났다. 재밌는 건 거기다 샷 추가 비중까지 훨씬 더 높았다는 거다. 1L 아메리카노에 샷을 추가해 물처럼 마시던 동료가 떠올랐다. 그리고 온갖 메뉴에 '샷 추가'를 외치던 내 모습도. 추운 겨울날 고구마라떼에 샷을 추가하면 군고구마 맛이 나는 든든한 아침 대용 음료가 된다. 무더운 여름엔 시원한 아이스 페퍼민트티에 샷을 추가한다. 목 끝까지 시원하게 넘어가는 극강의 '아아'를 즐길 수 있다. 그래도 꾸벅꾸벅 졸게 된다면? 그땐 레몬에이드에 샷 추가. 짜릿한 맛에 졸음이 싹 달아난다.
일상 속에서 '커피 한 잔의 여유'를 누릴 수 있는 순간은 생각보다 많지 않다. 평일의 커피는 일을 할 수 있도록 몸을 만들어주는 각성제에 가까우니까. 한국의 산업화 시기 노동자들에겐 한 입에 털어 넣기 좋은 믹스커피가 있었고, 4차 산업혁명 시기 한국 노동자들에게는 김을 식히느라 천천히 기다릴 필요 없는 '아아'가 있다. 한국이 빠르게 커피 소비 대국에 올라서게 된 배경에는 어마어마한 노동시간이 한몫하지 않았을까? 우리나라 사람들의 연간 커피 소비량은 367잔이라고 한다. 세계 평균인 161잔보다 두 배 이상 많다. 커피 시장 규모는 미국과 중국에 이어 세계 3위다.
주 69시간제 논쟁이 뜨겁다. 4차 산업혁명 시기 노동시간 유연화로 글로벌 경쟁력을 강화하기 위함이라는데, 실은 글로벌 커피 시장 1위가 숨겨진 진짜 목적인 것 같다. K-콘텐츠 산업 발전 배경의 한 축에 정부의 정책적 지원이 있었듯, 주 69시간제는 사실 커피 문화 융성을 위한 정부의 대대적인 지원책인 것이다. K-콘텐츠를 잇는 새로운 소프트파워로서 K-커피 문화의 융성!
그런데 정부가 놓친 게 있다. 커피 '소비' 대국에서 커피 '문화' 대국으로 거듭나기 위해서는 양보다는 질이라는 것을. 그래서 나는 '커라밸'을 이야기하고 싶다. 커피&라이프 밸런스. 커피와 라이프의 자연스러운 밸런스를 되찾자는 거다. 카페인을 과도하게 섭취해서 생체 시계를 일부러 깨우는 일이 없도록 말이다. 커피가 쉽게 구할 수 있는 각성제가 아닌 한 잔의 여유가 될 때, 비로소 우리나라가 커피 문화 대국이 될 수 있으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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