용산에 저녁 약속이 있었다. 평소에 잘 가지 않는 동네에 방문할 기회와 머리 깎을 시기가 겹치는 길일이었다. 들뜬 마음으로 약속 장소 인근 바버 숍을 검색했고 첫 페이지에서 US 바버샵이라는 곳이 눈에 띄었다. 역시 용산은 지역색이 남다르다 생각하며 업장 사진을 보니 천장에 태극기와 성조기가 사이좋게 매달려 있었다. 손이 빠르게 ‘뒤로 가기’ 버튼을 눌렀다. 특정 정치 성향은 없지만 그리했다.
10분여 간의 뒤적거림에도 흥미로운 곳이 마땅치 않았다. 들뜬 마음은 이내 가라앉았고, US 바버샵이 다시 생각나던 찰나에 바버&레이디라는 상호를 발견했다. 머릿속에 석희정 미용실이 스쳐갔다. 이번에도 손이 빠르게 예약을 마쳤다. ‘이곳에는 어떤 이야기가 나를 기다리고 있을까?’ 정작 만나면 물어보지도 못하는 마음이 다시 찰랑였다.
바버&레이디는 해링턴 스퀘어라는 새로 올라간 대형 주상복합 단지 내 Mall A 101동 2층에 꼭꼭 숨어있어 찾는 것이 여간 어려운 일이 아니었다. 단지를 돌다 돌다 미술 전시관이었던 것 같은 곳의 리셉션 직원에게 “여기 해링턴 스퀘어가 어디요?”라고 묻자 “여기요.”라는 또랑한 답변이 왔다. 나도 또랑하게 그녀를 바라보다 이내 다시 지도를 열었다. 두 번 세 번을 봐도 Mall A 101동을 찾아갈 자신이 생기지 않았다. 나도 이제 목적지에 물어 물어 도착해야 할 때가 되었나 보다.
어찌어찌 찾아간 바버 숍에 도착했을 때 나는 이곳이 바버 숍이 아님을 직감했다. 알 수밖에 없었다. 바버 숍에는 흔치 않은 열처리 기계들이 줄지어 일하며 노래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이제 와 다시 검색해 보니 여성들의 후기가 대부분이었다. 바버&레이디의 레이디가 손님이었을 줄이야. 상호만 보고 찰랑인 마음이 반의반 치 앞을 가렸던 것이다. 해링턴 스퀘어를 영영 찾지 못했어야 했다.
굽이굽이 찾아온 역경이 아까워 마음을 다잡고 자리에 앉았다. 바버&레이디의 바버가 머리를 빗으로 이리 뒤집고 저리 뒤집으며 원하는 스타일이 무엇인지 물었다. “위는 길게, 옆은 짧게 하시오.”라고 말하자 “아니오.”라는 예상 밖의 답이 돌아왔다. 그는 손질하기 편하고 ‘네가 말한 것처럼 이상하지 않은’ 스타일로 해주겠다며 위도 짧게 가자고 했다. 어떤 스타일을 말하는 것인지도 알고 좋아하던 스타일이기도 했다. 그러나 지금 원하는 건 그것이 아니었다.
하지만 그 어떤 주장도 회유도 먹히지 않았다. 내 빠른 손으로 평소에 타고 다니는 가르마를 보여줘도 소용없었다. 말이 통하지 않았다. 결국 칼자루를 쥔 그를 거스르지 못하고 그의 제안을 수용했다. 마음이 강하지 못한 죄의 삯을 머리가 받았다.
머리를 깎으면서 거울을 들여다보고 있는 편은 아닌데 이번에는 그래야 했다. 그의 ‘짧게’와 나의 ‘짧게’도 서로 통하지 않을 가능성이 높았다. 용산 레이디가 아니라 용산 대머리가 될 수도 있다. 다행히 그가 실력이 없는 것은 아니었다. 조금씩 정리되는 머리를 보며 안도했다. ‘이 정도면 만족스럽군’이라고 생각하며 긴장을 풀려는 순간 앞머리 한 편이 숭덩 잘려나갔다. 어차피 돌이킬 수 없다는 생각이 끝나기도 전에 횡대 전체가 숭덩숭덩 잘려나갔다.
더 이상 거울을 보지 않았다. 의미가 없었다. 누구의 잘못도 아니다.
체념하자 졸음이 왔다. 늘 그렇듯 바리캉 ASMR을 들으며 반은 깨어있고 반은 잠들어 있는 상태로 마지막을 준비하는 듯했다. 그런데 갑자기 얼음장 같은 차가움이 날 깨웠다. 옆머리에 약품 처리가 되고 있었다. 그는 나에게 한 마디 상의 없이 다운 펌 약을 바르고 있었다. 분명 호의라고 생각했을 것이다. 나는 머리카락이 한 올 한 올 소중해지기 시작하며 다운 펌을 하지 않는다. 자극을 조금이라도 줄이고 싶었다. 이때부터는 웃음이 나오기 시작했다. 웃는 것 말고는 할 수 있는 게 없었다.
뉴스레터 소개 글에 소개하였듯 나는 스타일링에 크게 관심이 없다. 한 달간 날 편하게 해주면 그만이다. 하지만 이날은 의지가 없는 사람이 어디까지 끌려갈 수 있는지 내 두 눈으로 똑똑히 지켜봐야 했다. 그는 계산을 도와주며 스타일과 잘 어울린다며, 손질이 편할 거라며 다시 한번 자신했다. 카드를 받고 건물 밖을 나섰다. 약속 장소로 가기 위해 해링턴 스퀘어를 벗어나자 그날따라 강했던 바람이 내 마음과 머리를 세차게 흔들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