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실 스타일링에는 크게 관심이 없다. 많은 남자들이 그렇듯 내가 원하는 걸 구구절절 설명하지 않아도 되는 인생의 동반자를 찾고 싶었다. 하지만 5년이 넘도록 그는 나타나지 않았고 난 아직 혼자다. 기왕 이렇게 된 거 매월 이발소 여행을 떠나볼까 한다. 한 달에 한 번은 머리를 깎아야 하니까. 조금은 외딴 곳에 자리한 1인 이발소였으면 좋겠다.
아버지와 일하는
남자 이야기
Scott ㅣ2022.08.04
이발소 여행의 첫 번째 도착지는 마포구 연남동 남자이야기라는 곳이다. 홍대입구역에서 700m 남짓 떨어져 있는 조용한 골목에 숨어 있다. 홍대는 자주 오는 곳이 아니라 주변 동네에 대해 아는 바가 없지만(그렇다고 자주 가는 동네도 없다), 연남동이라 그런지 연식 있고 매력적인 집들을 구경하는 재미가 있었다. 빨간색 베스파와 넝쿨장미 사이에 서 있는 옥색 기와담장은 외부인을 오히려 반겨주는 듯 했다. 덕분에 담장의 의미를 잊은 한 외부인은 안 쪽으로 들어가 사진을 찍다 어디서 오셨냐는 의심 담긴 질문을 들었다. 그게 바로 나다.
연남동이라 그런지 회사 동료가 내 눈 앞을 활보하기도 했다. 영화를 좋아하는 그녀다. 우연히 지나치는 걸 보고 따라갔는데 이렇게 걸음이 빠르고 활기찬 사람인 줄 처음 알았다.
동료를 보내고 남자이야기에 도착했다. 상호명은 어디 붙어있는지 보이지 않았고, 세로로 길게 붙은 다섯 개의 바버샵 표지판들을 보고 맞게 왔음을 짐작했다. 남자이야기는 이발사 한 분이 운영하고 있는 곳이다. 혼자 쓰기에도 널찍한 공간은 아니었지만, 혼자이기에 개인적 취향과 추억을 마음껏 담아 놓은 것 같았다.
이 곳은 이발사께서 유튜브를 운영하고 계셔서 알게 된 곳이다. 유튜브 채널 이름은 ‘백년 이발사’, 2대째 가업으로 이발사의 길을 가고 있다는 소개가 무척이나 끌렸다. 혹시 아버지가 이발소를 하시던 바로 그 자리인지 영화 같은 전개를 기대하며 물어봤지만 아쉽게도 그건 아니었다. 하지만 바버샵 안에는 아들이 일하는 모습을 지켜보듯 이발 공간 뒤로 아버지의 사진들이 여럿 놓여 있었다. 휴대폰 사진첩에도 아버지 사진은 좀처럼 찾기 힘든데 일터에 가득한 아버지 사진이라니.. 분명 이발사라는 직업 그 이상을 물려 받으신 것 같다.
“단순히 아버지가 하는 일이 멋지다고 생각해 이발을 시작했어요. 그런데 세상이 보는 눈은 그렇지 않았어요.”
아버지에게 멋진 직업을 물려받았지만 이발소에는 ‘퇴폐’ 아니냐는 꼬리표가 따라 다녔다고 한다. 하지만 그가 이발 일을 시작한 곳은 당당하기 더할 나위 없는 남자목욕탕. 세상의 시선과는 상관 없이 이발사라는 직업 하나만 보고 일을 시작한 것이다. 하지만 그런 그도 세상의 변화에는 순응한 것 같았다. 90년대 후반 ‘블루클럽’이 생겨난 이후 남자 전용 미용실이 성행했고, 최근에는 바버샵 문화가 자리잡고 있는데, 이런 변화가 있을 때 마다 컨셉과 스타일을 조금씩 바꿔가며 본인의 정체성도 바꿔갔다고 한다. 그런데 상황이 이렇게 수 차례 변하는 동안에도 아버지가 알려준 이발의 기본에는 변한 것이 없다고 그는 또 말했다. 고객이 원하는 스타일이 조금 바뀐 것일 뿐. 변해야 할 것과 변하지 말아야 할 것에 대한 기준이 명쾌했다.
이 이야기를 할 때 쯤 이발 시간은 끝이 났다. 다음 손님이 이미 내의만 입은 채 본인의 차례를 기다리고 계셨기 때문에 더 이야기를 나누기는 어려웠다. 하지만 30분도 안되는 시간에 이발사 한 명의 인생 전체을 들은 기분 때문일까? 아니면 그의 침착한 말투 때문일까? 그의 삶에 깃든 평화가 느껴졌다. 그는 부모가 나에게 남긴 것과 내가 맞닥뜨린 세상을 적절히 조화시키며, 내면에 큰 충돌 없이 살고 있는 것 같았다.
평화라니.. 부러웠다. 물론 6·25때 난리는 난리도 아니라는 말이 있듯 평화 또한 상대적일 것이다. 그는 그만의 전쟁을 치르고 있겠지. 그러나 평화를 비교당한 나는 나만의 평화를 찾고 싶게 되었다. 그 평화가 나의 일에 대한 정의에서 올 것인지, 내 가족에 대한 정리에서 올 것인지, 아니면 평화를 사랑한 히피들처럼 대마초를 한 대 펴야하는 건지는 잘 모르겠다. 어찌 되었든 그런 것이 내 안에는 존재하지 않을 테니, 거리를 걷다 툭 하고 나타나주기를 바라면서, 이발소 여행을 계속 해봐야겠다.
이발은 싱글몰트와 함께
a.house Gallery Cafe
이발은 토요일 오후 4:30 예약, 연남동 도착 시간은 2:30이었다. 동네를 여기저기 구경했지만, 두 시간은 생각보다 긴 시간이었고, 카페를 찾았다. 창 밖으로 보이는 손님이 한 명뿐인 반 지하 카페였는데, 들어가 보니 그 손님이 카페 주인이셨다.
카페의 첫 인상이 조금 특이했다. 카페는 맞는 것 같은데 공간 가운데 있는 큰 테이블 위에는 다도세트가, 벽에는 우리나라 전통주의 그림들이 걸려 있었다. 사장님께서 카페 겸 갤러리 공간이니 편히 구경하라고 하시며 어리둥절한 나를 안심시켰다. 왠지 차를 시켜야 할 것 같아 과일차를 시키고 그림들을 보고 있는데, 사장님이 뒤에서 불쑥 나타나 술에 관심이 있으면 전통주 무료 테이스팅을 해보겠냐고 물어오셨다.
생소한 제안에 당황한 마음을 섞어 ‘네’라고 대답했는데, 내 눈 앞에는 순식간에 우리 쌀로 만든 세 병의 술이 놓여있었다. 심지어 술을 만드는 순서와 동일하게 탁주, 청주, 소주 순으로 안내해주셨다. 이발 전에는 싱글몰트 한 잔을 해야한다고들 하지만, 테이스팅은 생각보다 본격적이었고 이 날 마침 9개월 간의 금주가 끝났던 나는 떨렸다.
어느덧 돈을 내고 시킨 과일차는 차갑게 식어갔고 공짜 술로 채운 나의 빈속은 뜨겁게 달궈졌다. 내 정신 역시 “금주가 끝난 걸 하늘이 아시고 나를 이 곳으로 인도하셨다”고 생각할 정도가 되었다. 운명론 같은 헛된 믿음은 취기에서 오는 것 같다.
정신을 가다듬고 이야기하다 보니 여기는 일본문화교류와 관련된 일을 하시는 분들이 일종의 홍보 거점으로 마련한 곳이었다. (그래서 일본 술도 얻어먹었다.) 오랫동안 일본 술 공부만 해오다 우리나라 전통주에 대해서도 알리고 싶은 마음이 생겼고, 전국 양조장들을 돌며 조사해 이 중 50군데를 선정한 책도 발간했다고 한다. 책도 물론 샀다. 취해서는 아니다. 1독하고 꼭 다시 들르고 싶은 곳이었다. 뜻하지 않은 반가운 만남에 나는 연신 유레카를 외치며 총 6잔의 술을 얻어 마셨고, 얼큰하게 취한 채 이발소로 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