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느해 7월의 셋째주 금요일이었다.
작열하는 태양에 흐물해져가는 한 주의 끝, 그날은 제안서를 제출하는 날이었다.
"브리도 바쁘지 않으면 같이 갈래요?"
제안서를 제출하러 가는 곳은 을지로. 벌써 머릿속에는 인쇄소 골목 사이로 유명하다는 카페의 이름들과 술집들이 스쳐갔다. 게다가 금요일 이 시간에 외근이면 직퇴각이지 않은가? 냉큼 따라나섰다.
제안서를 고이 제출하고선, 홀가분한 마음으로 을지로 맛집을 검색했다. 우리가 찾은 곳은 현지인이 운영한다는 베트남 음식점. 당장 여름휴가는 못 가지만 베트남 어딘가에 있는 기분이라도 내고 싶었다. 쌀국수와 분짜, 그리고 차가운 맥주 한 잔에 제안서 준비의 고단함까지 씻겨내려 가는 것 같았다.
식사를 마치고 카페에서 커피를 한잔 하며, '이 제안서가 되면 또 얼마나 바빠질까'하는 회사 동료들과 평일 업무시간에 나누기 적합한 이야기를 하다가, 달달한 디저트를 한 입 먹고서는 이내 불금의 직장인 모드가 되어 '주말엔 뭐 하지'하는 고민에 빠졌다.
오후 반차를 쓰고 여행 가방을 챙겨온 벨라가 몹시 부러워지는 시간이었다. 커피를 한잔 하고 카페 문을 나서면 벨라는 공항으로 간다고 했다. 제주도에 서핑을 하러. 제주 바다의 부서지는 파도가 그려졌다. 그녀의 계획을 들으며 나도 잠시 비행기를 타고 제주로 향하는 상상에 빠졌다. 제안서가 되면 팀은 바빠질 테고, 그럼 나도 바빠질 테고, 그럼 언제 쉴 수 있을까... 떠나고 싶은 욕망과 앞으로 쏟아질 업무 부담이 뒤섞여 갈 때,
"브리도 떠나!"
벨라가 아니라 이사님이 한 말이었다.
"네? 지금요?"
"휴가 쓰고 가면 되지~"
'이사님이 그런 말을 해도 되는 거에요?' 속으로 생각했다.
생각은 속으로만 하고, 손으로는 당장 그날 떠날 수 있는 비행기 표를 검색했다. '그래, 지금이 아니면 올여름에 바다는 못 갈 거야!' 마침 비행기 표가 있었고, 우리 집은 을지로에서 공항으로 향하는 길에 있었다.
그렇게 그날 오후까지만 해도 땡볕이 내리쬐는 서울 하늘 아래 있던 나는 밤에는 제주의 밤바다가 바라다보이는 곳에 있었다. 깜깜한 제주 바다, 방파제에 부딪치는 파도 소리에 오히려 더욱 강렬하게 바다의 푸른빛이 그려졌다.
그해 여름휴가는 바다로 가득 채웠다. 오전에는 서귀포 색달해변에서 벨라를 만나 서핑을 배웠고, 오후에는 차를 몰고 올라와 제주 서쪽의 아기 같은 금능해수욕장에서 비양도를 바라보며 튜브에 몸을 걸치고 놀았다. 판포포구에서는 발이 닿지 않을 만큼 깊은 물 위에서 탁 트인 하늘을 바라보며 바다 위에 그대로 누웠다. 잔잔한 물결의 움직임과 천천히 흘러가는 구름의 움직임이 하나인 듯 느껴졌다.
여행을 다녀오면 그때의 기억으로 몇 달을 혹은 일 년을 버틴다는 말을 전에는 이해하지 못했었다. 지금은 그때의 풍경을 사진첩처럼 펼쳐본다. 훌쩍 떠나버린 그 무모함과 계획이 없어 오히려 더 마음 편히 즐길 수 있었던 그 시간을.
그 사진첩 속에 제주 서쪽 바다의 한적한 시골마을에 있는 '카페동경앤책방'이 있다. 창을 마주하고 앉으면 창밖으로 멀리 여린 하늘빛의 바다가 살짝 보인다. 마음에 여유가 필요할 때, 그때 그 자리에 앉아 창밖을 바라보던 시간을 종종 되감기 한다. 길고 육중한 나무 테이블, 앤틱한 찻잔에는 커피가 담겨 있고 커피향은 김처럼 피어오른다. 노곤해진 몸은 이미 가죽 소파에 푹신하게 묻혀있다. 카페에 틀어놓은 라디오는 클래식 채널에 맞춰져있다.
마음에 여유가 없어 사방이 벽처럼 느껴지는 시간 속에서 그때를 떠올리는 건, 벽 사이로 난 창밖으로 보이던 제주의 푸른 바다가 주는 해방감 때문일 수도, 푹신한 소파가 몸을 감싸는 안정감일 수도, 균일한 박자의 클래식 선율이 주는 정돈됨일 수도 있다. 그때의 감각들이 모여 번잡한 서울의 시간들 속에서 잠깐이나마 제주로 향하는 문을 내어준다.
'카페동경앤책방'은 제주에 가면 꼭 향하는 곳이다. 일을 그만두고 제주에서 한달살기를 할 때, 제주 시내에서부터 차를 몰고 그곳에 갔었다. 새마을금고 맞은편 우체국 건물의 이층에 위치한 카페였다. 맞은편에는 철물점이 있었고, 또 그 맞은편에는 약국이 있었다. 시골마을의 아기자기한 번화가였다. 우체국 옆으로 난 좁은 계단을 올라가면 옥상의 안쪽으로 카페동경앤책방이 나온다.
카페 이름 때문이었을까. 메뉴 이름 때문이었을까. 사장님의 낯선 말투에, 혹시 일본 분이신데 제주에 놀러 왔다가 사랑에 빠져 이곳에 이곳에 정착해 이런 카페를 열게 되신 것일까 상상을 펼치다가, 카라시에그샌드위치를 주문했다. 이미 점심을 넘긴 시각. 햄, 오이와 계란을 넣고 일본식 겨자소스를 베이스로 한 따끈한 샌드위치가 앤틱한 접시 위에 올려져 나왔다. 아직 따뜻한 김이 남이 있는 촉촉하고 부드러운 질감의 식빵 사이로 톡 쏘는 겨자 소스와 폭신한 계란이 어우러져 입안을 가득 채웠다. 일본에 살아본 적도 없으면서 일본에 있는 친구 집에서 집밥을 먹는 느낌이 들었다. 제주 한달살기라고 하면 누구든 낭만적인 한 달을 꿈꾸기 마련이지만, 막상 해보니 매 끼니마다 내 먹을 것 하나 준비하기 벅찼던 나는 그 기본에 충실하면서도, 그렇기에 다른 어딘가에서는 맛보기 힘든 그 맛에 따뜻한 환대를 받는 느낌이었다.
누군가 날 위해 정성 들여 만들어주는 식사. 커피와 샌드위치라는 아주 간단한 조합이지만 그것만으로 충분했다. 그렇게 널브러져서 창밖을 바라보는 시간, 그것만으로 충분했다. 그래서 훌쩍 떠난 순간에도 제주 서쪽의 시골마을을 찾았었는지 모른다. 그것만으로 충분한 시간을 가지려고. 그런 시간을 차곡차곡 쌓아두고 싶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