찰나와 영원을 함께 다룰 수 있는 분야는 무엇일까. 「에닉의 한 글자, 한 글자」
"에닉의 디스턴스 기고가 실리는 그날까지" 라는 말을 처음 들었던 6개월 전 어느 여름날. 과연 그날이 진짜 올까? 걱정도 되고 설레기도 했던 기억이 있습니다. 그런 제게! 글을 올릴 수 있는 소중한 기회가 주어졌는데요. 이 순간이 영원히 기억될 수 있도록, 한 자 한 자 꾹꾹 누르며 적어 내려가보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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Enic (객원 에디터) ㅣ2023.12.14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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찰나와 영원을 함께 다룰 수 있는 분야는 무엇일까. 별을 관측하는 천문학? 자연의 신비를 분석하는 식물학? 전부 아니다. ‘찰나의 순간을 영원히 기억하는 것’, 바로 덕질이다.
24년의 인생 중 내가 덕질에 투자한 시간을 합치면, 절반은 족히 넘을 것이다. 최초의 덕질은 2006년 방영되었던 <방귀대장 뿡뿡이>의 ‘짜잔형’이었다. 핏한 모자, 검정색 줄무늬 티셔츠는 7살을 설레게 만들기 충분했다. 그렇게 나는 짜잔형을 시작으로 이름하여 ‘덕질 엘리트 코스’를 밟으며 자라나기 시작했다. <모여라 딩동댕>의 번개맨부터, 드라마 <꽃보다 남자>, <해를 품은 달>, 그리고 마침내 K-POP까지. 나는 점점 돌아올 수 없는, 아니 돌아오지 않을 강을 건너고 말았다.
이쯤 되면 도대체 ‘덕질’이란 무엇인가, 무엇이길래 이토록 열광하는가? 궁금해질 것이다. 지금부터 그 판도라의 상자를 한번 열어보고자 한다.
덕질의 사전적 정의는 다음과 같다.
‘어떤 분야를 열성적으로 좋아하여 그와 관련된 것들을 모으거나 파고드는 일’
그 분야는 영화가 될 수도, 브랜드가 될 수도, 어쩌면 푸바오가 될 수도… 그리고 사람이 될 수도 있다. 이 중 나는 ‘사람’을 덕질하는 ‘K-POP’ 덕후이다. 음악을 감상하는 것에서 나아가 가수 그 자체를 응원하고 좋아하는 마음만 가지고 있다면 누구나 ‘팬’이 될 수 있다. 그 형태 역시 다양하다. 앨범을 사는 것, 콘서트에 가는 것, 혹은 조용히 응원만 하는 것 역시 팬의 모습이 된다. 같은 시간을 공유하고, 감정을 나눈다는 것만으로도 서로는 ‘팬’으로 묶인다.
팬들은 서로 다양한 경험과 문화를 공유한다. 그중 몇 가지를 간략히 소개하고자 한다. 첫 번째, 바로 예절샷이다. 여기 소녀 2명이 식당에 앉아 있다. 뜨끈뜨끈 김이 나는 음식이 나오는데… 다음 중 소녀 2명이 할 행동으로 옳은 것은 무엇일까. 음식과 함께 셀카를 찍는다? 김이 식기 전, 음식을 얼른 맛본다? 땡! 정답은 ‘아이돌 포토카드를 식탁 위에 놓고 사진을 찍는다’이다. 음식과 포토카드를 함께 놓고 인증샷을 찍고, 그걸 SNS에 올려 함께 공유하는 것이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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좋아하는 아이돌의 사진과 맛있는 음식, 그리고 그걸 함께 공유하는 친구들까지. 팬들만의 소통문화인 셈이다. 여담으로 맛집을 찾고 있다면 아티스트만의 ‘맛집 해시태그’를 SNS에 검색해 보라. 팬들은 맛있는 식당만 알짜배기로 공유하니, 분위기 좋은 식당 정보를 얻을 수 있을 것이다.
두 번째로 소개하고 싶은 문화는, 바로 아카이빙이다. 팬은 자신이 좋아하는 아티스트의 모든 순간을 기록한다. 무대 영상 아카이브, 오늘의 OOTD 아카이브, 심지어는 군대를 간 아티스트의 당일 배식 메뉴 아카이브까지 존재한다. 아티스트가 공개하고 싶은 선 안에서 팬들은 모든 순간을 기록하게 된다.
세 번째 문화는, 바로 2차 창작이다. 팬들은 아티스트를 사랑하는 것에서 나아가 그들을 통해 인형, 슬로건, 부채 등 다양한 굿즈를 만들어 낸다. 특히 인형은 ‘포토카드’와 함께 절대 빼놓아서는 안 되는 덕질의 필수품! 아티스트를 닮은 동물(a.k.a 모에화) 인형을 통해 가방 속 작은 행복을 들고 다니게 된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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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렇듯 팬들 간의 문화는 생각 이상으로 다양하고 폭넓게 자리 잡고 있다. 그렇지만, 이 중 ‘덕질’에 큰 영향을 미치는 것은 따로 존재한다. 사실 조금의 거짓말을 보태 인생의 절반이 넘는 시간을 누군가의 ‘팬’으로 살아온 나 역시 ‘나는 왜 누군가의 팬이길 자처하는가’에 대해 고민해 본 적이 있다. 누군가를 덕질한다고 해서 부유해지는 것도, 그 사람이 나를 알아주는 것도 아니니 말이다. 그리고 곧바로 깨닫게 되었다. ‘덕질’ 문화가 주는 또 다른 세계를 말이다.
단 한 번도 만나보지 못한 사람들도 누군가의 ‘팬’이라는 공통점을 갖게 된다. 그리고 그 공통점은, 누구에게나 쉽게 말을 걸고 공감을 할 수 있는 ‘핑계’가 되어준다. 실제 콘서트 혹은 팬미팅을 가게 되면, 남녀노소 불문하고 ‘팬’이라는 이유 하나로 쉽게 말을 걸고 관계를 맺게 된다. 나는 한 아이돌 그룹의 콘서트에 가서 무려 7살 차이가 나는 부산소녀와 친구를 맺기도 하였다. 학연, 지연이 아닌 ‘덕연’이 발휘되는 것이다.
최근, 중장년층의 마음을 훔친 가수 임영웅과 관련된 일화에서도 이와 같은 문화가 등장한다. 가수 임영웅 씨를 좋아하게 되면서, 외로움을 타고 하루종일 멍하게 앉아만 있던 엄마가 활력을 되찾았다는 것. 그리고 새로운 친구를 사귀며 하루하루를 즐겁게 보낸다는 것이다. 사실 팬들은 덕질 자체에 끌리는 것이 아닌, 덕질을 했을 때 나에게 찾아오는 변화와 소속감에 매료되는 것이 아닐까. 소통이 어려운 사회에서, 한줄기 ‘핑계’를 만나 누구에게나 쉽게 대화를 건넬 수 있다는 것. 그리고 같은 순간을 공유할 수 있다는 것에 대해 말이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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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떤 이들은 ‘덕질’이 참 신기하다고 얘기한다. 직접 만나지도 못하고, 내가 누군지도 모를 텐데 왜 그렇게까지 좋아하느냐고 말이다. 사실 어느 정도 공감한다. 많은 시간과 돈을 투자해도 결국 그들에게 나는 그저 지나가는 '조연 1'이지 않을까. 그렇지만, 어떤 팬의 말처럼 ‘누군가는 기억하지도 못할 한 순간을 영원히 사랑할 수 있는 것’을 덕질이라고 정의한다면, 그리고 그 순간을 많은 이들과 함께 추억할 수 있다면, 나는 기꺼이 그 영원을 맞이할 준비가 되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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