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느 날, 회사 계정으로 단체 메일 하나가 날아왔다. 「자스민의 중고영화」
교복을 입고서 비디오 가게를 뻔질나게 드나들던 시절에 영화감독의 꿈을 품고 대학에서 영화 연출을 전공했다. 졸업영화를 찍고 방황의 시기를 보내다가 영화 홍보마케터로 수년간 일하며 영화계의 쓴맛 단맛을 고루 섭취하고, 무럭무럭 자라 글 쓰는 마케터가 되었다. <자스민의 중고영화>에서는 스크린에 비춰진 거리 속 장면을 일상의 프레임으로 옮겨본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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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느 날, 회사 계정으로 단체 메일 하나가 날아왔다. [디스턴스]의 디자이너 중 한 명인 리지가 3개월간의 프로베이션을 마치고 입사 기념 PT를 준비하면서 동료들의 취향을 엮어낸 매거진을 만든다는 소식이었다.
‘취향’이라는 키워드를 보자마자 소재거리들이 반짝 떠올랐다. 나의 취향을 가장 잘 드러낼 수 있는 대상은 무엇일까? 최근에 인상 깊게 본 영화이거나 평소에 가장 애정 하는 영화일지 혹은 스무 살 언저리부터 들어온 인디밴드 아티스트일지, 그것도 아니면 집에서 한 모금씩 음미하며 홀짝이는 위스키 브랜드일지, 가끔 일상 속에서 머리를 비우러 찾아가는 미술관일지, 또는 나름 인생의 깨달음을 얻었던 타국의 낯선 장소일지…. 남들이 알아주지 않아도 소중히 여겨 애지중지 가꿔온 취향을 마음껏 자랑(?) 할 수 있는 기회가 행복한 고민을 불러온 셈이다.
모름지기 성인이라면 누구나 확고한 취향을 지녀야 한다고 주장하는 건 아니지만, 나에게는 누군가의 매력을 따질 때 스스로가 취향을 정확히 파악하고 있다는 건 플러스 요인으로 작용한다. 취향을 안다는 건 눈앞에 놓인 여러 선택지 중에서 취사선택을 할 수 있을 만큼 풍부한 경험을 해봤다는 반증이기도 하니까. 여러 번의 실패를 거듭했거나 자연스러운 변화를 겪은 후에 안착한 취향은 곧 나라는 사람을 구성하는 나이테를 한 겹 더 촘촘하게 새기게 해주리라.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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취향을 논할 때 빼놓을 수 없는 텍스트 중 하나가 영화 <소공녀>이다. 주인공 ‘미소’는 안락한 거처를 마련하기 위해 아둥바둥하며 집세를 모으기보다 하루 일과 끝에 마시는 위스키 한 잔에 더 큰 값어치를 매기는 인물이다. 야무진 손길로 남의 집을 청소하고서 가사도우미 일당으로 만 원짜리 몇 장을 손에 쥐면, 단골 바에 들러 한 잔에 만 원이 넘는 위스키를 주문하는 건 예삿일이다.
실제로 사직동 근처 골목을 거닐다가 영화 속에 등장하는 위스키바 [코블러]를 우연히 발견할 때면 조용히 문을 열고 들어가 그가 마시던 위스키를 주문하고픈 충동에 휩싸이곤 한다. 그곳에는 깊은 풍미의 위스키 한 모금으로 고단한 영혼을 달래던 ‘미소’의 씁쓸한 자취가 베여있는 듯 하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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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공녀> 보도스틸 (제공: CGV아트하우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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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공녀>에는 ‘미소’가 이 집에서 저 집으로 거처를 옮겨 다니는 여정이 생생하게 담겨 있다. 한결같은 취향을 고수하기 위해 하루아침에 자발적으로 집을 비우고 나선 대가는 세간살이가 가득 들어찬 캐리어를 끌고 남의 집을 전전하는 것. 그 와중에 취한 전략이라면 예전에 밴드 활동을 함께 했던 멤버들을 하나씩 찾아가는 정도이다.
하지만 쉽게 예상할 수 있듯이 청춘을 노래하던 밴드 시절은 이미 지난 과거일 뿐, 현실에 안주한 멤버들에게 있어 하룻밤 잠자리를 청하는 ‘미소’는 달갑지만은 않은 존재이다. 타인의 불편한 시선을 느끼는 와중에도 여전히 ‘술 담배를 사랑’한다고 고백하는 그의 목소리는 무척이나 담담하다. 그럼에도 정처 없는 ‘미소’를 향해 불온한 눈빛을 보내던 선배(‘록이’)란 작자가 이대로 들어와 살라는 의미로 합방을 운운하는 순간에는 무해한 일침을 가하는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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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00 록이의 방 / 늦은 밤
어스름한 조명이 밝히고 있는 어두침침한 방.
침대에 비스듬히 누운 록이가 바닥에 앉은 미소를 빤히 보고 있다.
미소: 왜 하필 난데?
록이: 너 갈 데 없대매.
미소: 난 갈 데가 없는 게 아니라 여행 중인 거야.
- 중략 -
미소: 오빠, 나 떠돌아다닌다고 너무 막말하는 거 아니야? 내가 무슨 물건이야?
집이 없어도 생각과 취향은 있어!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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배우 이솜의 목소리를 빌어 ‘현대판 소공녀’의 탄생을 선포한 주옥같은 명대사는 인생을 표류하는 중이라 ‘믿고 있는’ 청춘들에게 반향을 불러일으키며 독립영화계에 한 획을 그었다. 빡빡한 현실을 살아가는 사회인으로서 취향을 고집하는 건 사치라고 여겨질 수도 있을 테지만, 누군가에게는 삶의 방향을 가늠하는 잣대가 될 수도 있음을 시사한 결과다.
비록 하루가 멀다 하고 거리를 방황하는 ‘미소’의 행보가 위태로워 보일지라도 결코 그는 자신의 인생에서 중심을 잃지 않는다. 그 올곧은 발자취를 따라 ‘미소’와 사람들 간의 거리는 가까워졌다 멀어지기를 반복한다. <소공녀>의 플롯은 단순히 거처를 옮겨 다니는 과정을 넘어서 이 사람에게서 저 사람에게로, 사람과 사람 사이를 여행하는 여정을 오롯이 담아낸다.
또 하나 ‘미소’가 거쳐가는 전환점에는 언제나 일편단심을 내비치는 다정한 연인 ‘한솔’이 자리한다. 물리적으로 몸을 둘 집이 없다고 해서 마음 둘 대상마저 없는 것은 아니라는 게 퍽 위안이 된다. 그러나 잠시 머물 보금자리조차 마련하기 어려운 이십 대 커플의 주머니 사정은 빤하고, 그들의 데이트는 짠하다 못해 애잔하기까지 한데… 그 덕에 몇 년 만에 다시 꺼내본 이 영화가 보다 더 애틋하게 다가왔는지 모르겠다. 그중에서도 ‘한솔’이 추구하는 사랑의 질감은 희생으로 채워지리라 유추할 수 있는 장면이 그러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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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 00 달동네 골목 / 낮
미소: 나는… 나는, 담배, 위스키, 그리고 한솔이 너. 그게 내 유일한 안식처야. 너도 알잖아. (작게 울먹이는) 근데 니가 없으면 어떡하라구!
- 중략 -
한솔: (침착한) 상상력을 발휘해 보자구, 우리.
미소: 무슨 상상력을 발휘해?
한솔: 옆에 있다고.
한솔의 눈에 눈물이 글썽인다. 거리 전경, 아무 말 없이 서로를 마주 보고 서 있는 미소와 한솔.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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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실의 벽에 부딪힌 연인이 움켜쥘 수 있는 선택지란 고작해야 상상력을 발휘하는 것이려니 싶어 또 한 번 아득해진다. 여기서 ‘미소’의 절박함이 새어 나오는 대사로 인해 마치 청춘이라는 장르를 스크린에 펼쳐낸 듯한 영화 <청춘 스케치(Reality Bites)>를 떠올려 본다. 리즈 시절의 에단 호크는 역시 리즈의 미모가 빛나는 위노나 라이더에게 이렇게 말한다. “우리에게 필요한 건 담배 몇 개비와 커피 한 잔, 약간의 대화, 너와 나, 그리고 5달러뿐…”.
이쯤이면 눈치 빠른 독자는 얼핏 깨달았을 것이다. 더 이상 애처로운 건 집 없이 방황하는 소공녀나 영화 속의 어린 연인이 아니라 그들을 안쓰럽게 바라보는 어른이 되어버린 나라는 걸. 가진 게 없어도 개의치 않았던 날들로부터 점점 멀어져 가는 아득한 거리를 체감하는 한편, 여전히 그 거리에서 오도카니 불을 밝히고 있는 ‘미소’의 그림자를 잊지 않으려 애써본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꼭 하나 놓치지 않고 싶은 게 있다면 그게 바로 취향이라는 거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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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공녀> 보도스틸 (제공: CGV아트하우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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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왕산 아래,
서울의 옛 정취가 묻어나는
사직동 골목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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① 영화 속 장소
위스키바 코블러, 경복궁역 7번 출구에서 약 200m (도보로 2분)
Tip. 코블러를 둘러싼 사직동 골목에서 큰 길을 건너 사직공원에서부터 약 2km 가량을 올라가면, 수성동계곡에 위치한 무무대 전망대에 다다른다. N서울타워를 중심으로 펼쳐지는 서울의 전경을 한 눈에 볼 수 있는 알짜배기 코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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